너와 나의 '정의', 우리들의 '정의'

조엘 슈마허, <타임 투 킬>

by 햇볕 냄새

"참 이상한 소송이야.

자네가 이겨도 정의가 승리하고, 져도 정의가 승리하니 말이야"


영화 <타임 투 킬>에서 변호사 제이크(매튜 맥커너히)에게 그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이쪽이 이겨도 정의, 저쪽이 이겨도 정의가 승리한다니?

이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정의, 그러니까 옳음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단 말인가?


그랬다.

나에게는 나의 정의가, 상대에게는 상대의 정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서로 충돌하는 각자의 정의 앞에서 '우리의' 정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제이크가 변호하는 남자, 칼리 해일리는 살인자다.

의도적으로 두 명의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살해당한 2명을 호송하던 경찰관에게도 총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경찰관은 한 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만 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는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법정 밖에서는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석방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어떤 이들은 그를 위해 모금 활동을 하고, 변호를 하겠다며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정의에 따른다면 그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비난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해일리를 석방하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고한 두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10살밖에 되지 않은 딸을 성폭행한 뒤 유기하여 죽기 직전에 이르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해일리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해도, 많은 국가에는 '자력 구제 금지의 원칙'이란 것이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직접적인 복수와 사적 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법과 제도에 호소해야 한다. 그런데 해일리는 자신이 살인자가 될 것을,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직접 총을 쏘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딸을 성폭행한 놈들은 백인이었고, 해일리와 그의 딸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KKK단이 사라지고 인종간 차별이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비공식적인 차별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성폭행범들은 무죄 처리되거나 유죄라도 해도 금방 풀려날 것이 뻔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수 없었던 해일리는 직접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해일리의 분노와 억울함을 이해할 만도 하다.(제이크도,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백인 경찰관도 자기 딸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자신 역시 그들을 죽였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과 법적인 판단, 책임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검사측과 사망한 백인 청년의 가족들은 살인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며 정의의 이름으로 해일리의 처벌을 주장한다. 그 반대편에서 주인공 제이크와 흑인 사회에서는 해일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내세우며 역시 정의의 이름으로 그를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양쪽이 주장하는 '정의'는 모두 그럴 듯 하다. 한쪽이 완전히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편다면 사실 그것은 고민꺼리도 아닐 것이다. 사회적으로 논쟁이 된다는 것은 양쪽 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제이크와 해일리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나 역시 해일리의 심정과 동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가 벌을 받지 않기를 바랐지만, 검사측의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사적 제재가 허용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법'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제이크는 해일리가 총을 쏠 당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그러니까 심신 상실을 주장함으로써 형사 책임을 면하게 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나는 정신 이상을 근거로 무죄를 주장한다는 것이 해일리가 범죄를 저지른 진정한 이유와 그 뒤에 숨겨진 사회적 문제를 희석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동기와 인종 차별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현실에서 모두가 백인인 배심원들로부터 '무죄'를 끌어내기 위한 방법이라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 가장 유효한 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전략은 실패하고,

결국 제이크가 배심원들에게 눈을 감고 두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함으로써, 그 소녀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다고 생각해볼 것을 요구함으로써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무죄 판결을 얻어낸다. 우리 눈에 보이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우고 백인 청년들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 그 자체만을 볼 것을 요구했던 것이 오히려 유효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사적 제재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아니라,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해일리는 단순히 복수심에 못이겨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고,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의 희생자이면서 그 오랜 사슬을 끊는 사회적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해일리와 제이크가 주장하는 정의, 검사와 저쪽 편에서 주장하는 정의는 모두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딪히는 두 개의 정의 중에서 더 중요한 쪽을 선택해야 하고, 때로는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어떤 옳음이 더 중요한 것인가는 절대적인 것도, 화석처럼 고정된 것도 아니다. 보편적 원칙, 법적 원칙이라는 것은 원칙 그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 맥락 속에서 재해석될 때만 살아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게 재해석될 때, 너와 나, 각자의 정의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이 모두 수용가능한 우리의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배심원들이 결국 마음을 돌린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공감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정의를 그들 마음 속에 구축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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