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고 난 며칠 뒤 숲길을 걷는다. 눈이 많이 녹았을 줄 알았는데, 밤새 얼어붙어 생각보다 길이 미끄럽다. 미끄러운 길에 대비할 수 있도록 산악용 신발을 신고 걷는다. 잘 넘어지는 편이라 한때 계단에서 엉치뼈를 다치기도 했던 나는 조심조심 찬찬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본다.
이게 뭐지? 잘린 나무 기둥 위로 눈은 쌓인 채로 얼어있고, 가운데 구멍에 누가 꽂아둔 듯 나뭇가지와 나뭇잎하나가 똑바로 꽂혀있다. 자세히 보면 나뭇가지는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길고 반짝이고, 나뭇잎은 망토를 발끝까지 두른 마법사 같다. 이 숲 속을 지키는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다. "시간아 멈춰라!"
조금 더 걷다 보면, 기둥만 남은 나무 한그루가 짧은 팔하나를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참 귀여운 나무일세 하며, 사진을 찍으려니, 어느 예술가가 산책로 난간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주고 갔다. 내 엄지손가락보다 아주 조금 큰 눈사람. 강추위 덕분에 눈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한쪽으로 기울어져 간신히 얇디얇은 나뭇가지 하나로 버티고 있다. 일자로 그어진 눈매와 입술은 버틸 만큼 버텼다는 표정이다. 눈이 다 녹은 다음에는 저 눈과 입, 팔만 남아 있겠지. 내가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 자리에 아주 작고 작은 눈사람이 오랫동안 버텼다는 것을 기억해 줘야겠다.
어느 연인이 다녀간 걸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도 따라서 하트를 그려보려고 하니, 단단히 언 눈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눈이 소복이 내렸을 때, 눈이 아주 가벼울 때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정한 한쌍의 하트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혼자 그린 걸까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나란히 서서 그린 걸까. 하트의 오목한 부분이 나무 난간의 가운데 지점을 기점으로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아주 아주 치밀한 사람인 것 같다. 아무려면 어떤가.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여름이 태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고향은 무섭게 추운 곳이어서 그랬는지, 또 아니면 엉성한 걸음걸이에 자주 넘어져서 그랬는지 나는 겨울이 싫었다. 그런데, 요즘엔 이상하다. 겨울이 좋아지려고 한다. 겨울도 자세히 보니 참 아름답고 다정하다. 차가운데 따스함이 곳곳에 숨어있다. 겨울이 좋아진다. 겨울에는 더욱 천천히 걸으며 예술가들의 흔적을 계속 만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