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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지 Apr 16. 2020

제 철에 나는 음식을 먹으면,

몸이 더 건강해 지거든! 1994년 4월 20일 

제 철에 나는 음식을 먹으면,
몸이 더 건강해 지거든!

오이 당근을 마요네즈에 찍어서 먹고,
딸기는 요즈음에
한창 나는 과일이니까
맛있게 드세요.

1994.4.20 엄마가 




해가 정말 길어졌다. 저녁 6시 반이 넘어도 하늘이 파란색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하늘과 시간을 매치시킬 수 있었던 건, 연 사흘을 내리 쉬고 난 뒤였다. 그중 하루는 정말 한 발자국도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을 보게 되었다. 바로 깨닫지는 못했다. '아 하늘이 밝네'라고 생각하고 시계를 본 뒤 다시 하늘을 보고 나서야 계절이 완연히 변해 해가 길어졌다는 걸 알았다. 이럴 때 봄이 왔다며 중얼거리게 된다. 


시간이 참 빨리 흐른다. 누구는 온난화를 탓하며 사계절의 흐름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모두가 봄과 여름의 흐름을 느끼고 짧아진 가을과 긴 겨울도 견딘다. 계절이 바뀌는 걸 모르고 넘어가는 건 어른이 되어 갈수록 더 심하다. 


해가 뜨고 져감과는 아무 상관없이 눈 뜨면 출근하고, 해가지면 퇴근하다 이동할 땐 차를 타고 다시 실내로 들어간다. 그게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느낄 일도 아니다. 가끔은 열심히 살았다고 뿌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시간에 쫓겨 자연의 흐름마저 잊었다고 쓸쓸할 때가 있지만, 어른이 되는 여러 과정에서 시간과 여러 가지를 교환하는 걸 받아들이니까. 




그래서 나에게 식탁은 중요하다. 온도도, 낮의 길이도 아닌, 식탁이 계절의 흐름을 가장 먼저 느끼게 한다. 여전히 엄마가 차려주는 식탁에는 사계절이 있다. 정월 대보름엔 늘 찰밥과 나물이 나오고, 때가 되면 달래 된장국 내음이 난다. 다양한 식재료를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에 아직 먹어보지 못한 것들이 많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꽤나 제철 음식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어릴 때의 나는 덕분에 새로운 채소와 과일의 이름을 하나씩 알아갔고, 그 뒤엔 그 음식들이 가지고 있는 영양소를 배웠다. 종종 하는 가족 외식은 그 철에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음식의 궁합을 깨달았다. 요즘엔 그 제철 음식을 가지고 하는 요리법을 전수해주고 싶은 것 같지만, 머리가 큰 모양인지 영 잔소리로 들려 실천은 안 하고 있다. (엄마 미안.) 때에 따라 변화하는 엄마의 식탁은 정말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옛 어르신들이 다 그렇듯 엄마도 '밥'에서 모든 건강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밥 먹자"라는 소리에 눈을 뜨고,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밥은?"이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몸이 아프다 하면 "제 때 밥을 잘 안 챙겨 먹고 외식만 하니까 그렇지"라는 핀잔이 돌아오고, 조금 혈색이 좋아 보이면 전날 먹었던 음식의 효능에 감탄한다. 가끔 너무 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맞는 말이다. 제철에 나서 제 때 필요한 영양이 있는 제철 음식을 먹는 것.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나도 요즘엔 엄마의 건강 상태를 '밥'으로 판단한다. 대부분의 경우 안타깝게 밥의 양을 줄이라는 잔소리를 하지만 내심 엄마가 "나는 입맛이 좋아서 큰일이야"라는 호들갑이 반갑다. 흔히들 우울함의 증거 중에 하나가 하고 싶어 지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고 그에 따라먹고 싶어 지는 것도 없어진다고 한다. 입맛이 돈다는 건 어찌 보면 살맛이 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만큼 마음도 편하고, 맛있는 것도 잘 느낀다는 소리니까. 때에 따라서 먹고 싶은 게 있고 그래서 그걸 직접 찾아다니는 삶의 재미가 아직 엄마에게 남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흐름을 엄마가 아직 부담스러워하기보다 오늘 날씨의 변화와 그때의 먹고 싶은 게 생기는 시간이 오래되길.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엄마의 나이까지 맛있는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 삶의 여유가 있길 바란다. 


딸기는 요즈음에 한창 나는 과일이니까, 맛있게 드세요. 


점점 무르익어가는 봄도, 딸기도 좋아한다.

엄마, 오늘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RE : 

야채에 마요네즈를 찍어서 먹던 어린이는 이제 고추장에 찍어서 먹는 어른이 되었어 엄마. 


엄마와 함께한 사계절이 많이도 흘렀는데, 여전히 엄마는 제철에 나는 음식을 차려주네. 덕분에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엄마가 밥이 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직도 입맛이 너무 좋아 탈이라는 엄마가 나는 너무 감사할 뿐이야. 엄마, 더 맛있는 거 제때 잘 챙겨 먹자.

 

늘 입맛이 있길. 그래서 몸이 더 건강해지길. 

오늘은 저녁 간식으로 딸기를 먹어요. 


2020.04.15. 예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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