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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지 Mar 08. 2020

용서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1994년 5월 2일


한 가지 교구 작업을, 순서대로 끝까지 하는 예지가 참 훌륭하구나. 
이 사람, 저 사람 기웃거리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잘 잡자.


그리고, 엄마의 사과를 받아주고, 용서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1994.5.2 엄마가 




쪽지를 하나씩 정리하면서 엄마가 더 고맙고 소중하긴 하지만, 쪽지에 정지되어있는 엄마와 나의 관계가 실제 나와 엄마의 매일 반복되는 생활과는 다르기 때문에 너무 감상적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혹은 쪽지에 정지되어 있는 그때의 엄마를 너무 대단하게 두지 않으려고도 한다. 엄마도 실수하고,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나는 더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근데, 이 쪽지는 대단했다. 마지막 한 문장 때문에. 


엄마는 미안한 상황에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이지만,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해왔으리라고 생각은 못했다. 




잘못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사과를 한다. 그리고 사과를 받은 사람은 용서를 한다. 가장 당연한 일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잘못한 일이라고 느끼는 기준은 서로 달라서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은 모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서로의 입장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내 마음을 몰라줬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감정과 관계에 대한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까지 쪽지에 남긴 걸 보면 무슨 문제인지 몰라도 그 전날 '내 입장'에서 엄마가 잘못 생각하는 사건이 생겼던 모양이다. 


나는 아마 울먹이면서 나의 속상함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엄마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는 내가 아니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엄마가 용서를 구하는 일은 대부분 이런 일었다. 엄마는 어린 나의 입장에서 나의 속상함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만약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았다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미안한 일이라고 엄마가 느끼곤 나에게 말과 얼굴을 마주 보며 용서를 먼저 구했고, 이후 내가 용서를 하고 사과를 받을 때까지의 충분한 시간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어린 내가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쪽지에 남겼다. 


아마 엄마는 그때 보고 있던 육아서적 속 조언을 그대로 따라 했을지 모른다. '아이에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는 감정 표현을 자주 해주세요.'라는 지침은 아이가 없는 나도 많이 들어서 아는 얘기다. 사람인지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엄마는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듣고 다시 한 번 자신 내면에 깊게 새겨 본인만의 색으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 그래, 대단한 엄마다. 




위에 썼던 엄마의 용서 외에 나는 그 쪽지에 남겨진 어린 시절에게 따끔한 채찍질을 받았다. 


쪽지 속 어린 나는 한 가지 일에 잘 집중하는 아이 었던가보다. 차분히 내가 원하는 교구 작업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의젓한 어린이. 무엇보다 남이 무슨 일을 하는지 기웃거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선택한 일을 묵묵히 하는 아이. 


그게 엄마는 마음에 달린 일이라고 얘기할 때가 왕왕 있었다. 나는 나이에 비해 마음을 잘 가다듬고 그 중심을 아는 사람이라고. 그때는 미처 몰랐을 거다. 마음의 가다듬는 일이 행동을 하는 일보다 힘든 일이라는 걸. 


요즘의 나는 집중을 잘하지 못한다. 언제부터 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남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래서 그 일로 얼마를 벌고 어떤 위치에 올라갔는지를 자꾸 확인하게 된다. 나와 같은 또래의 이야기라면 더 휩쓸리는 것 같다. 마음을 다잡기 쉽지 않은 탓이다. 나는 내 마음을 잘 가다듬으면 되는데 자꾸 주변에 휩쓸린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더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의 실제 능력이나 지금 가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모습의 격차를 줄여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행동을 보일 때, 좀 더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 보다 어른이었다. 


그때는 잘했고, 지금 잠시 못했지만 이제 알았으니 다시 가다듬기 시작하면 된다. 




용서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사과를 구하는 건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살아가면서 느낀다. 

그 용기를 아주 어릴 적 직접 보여주는 엄마가 있었다는 건 행운이다.  


용기 있는 엄마여서 고맙다. 혹여 굳이 용기를 보여주지 않으려 했어도 고마운 일이다. 


RE : 

엄마,

먼저 사과해주고 나에게 용서를 구해줘서 고마워. 


나는 때로는 바로 사과를 하는 그런 사람일 때도 있고 종종 먼저 실수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나서 스스로 후회하지만 오기를 부리는 그런 사람이 되었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는 하기 싫은 일들이 있잖아. 


근데, 엄마도 용서를 구하는데 내가 사과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면 안될 것 같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게. 

먼저 사과해줘서 고마워. 

2020.03.07. 예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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