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Sep 05. 2022

[로드스꼴라 글방] 도망의 이력 _ 모호

글방에 나오는 글을 읽노라면 기적, 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자동차에 치이지 않고 감전되지 않고 굶어죽지 않고 폭탄 맞지 않고 물에 빠져죽지 않고 불에 타죽지 않고 칼에 찔리지 않고 번개 맞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오늘 이 자리

말갛고 고운 얼굴로 

네가 내 앞에 

오, 있다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온전하다

미라클 모호

근사한 모호

마음껏 모호






도망의 이력


모호


나에겐 요상한 이력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금껏 세 번의 자퇴를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전적 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해서 학사경고를 받고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 아마 이 이력들은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거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력서에 적으면 서류에서 바로 탈락하겠지. 대외적으로는 “저만의 배움의 뜻이 있어서 자퇴를 선택했습니다.” 같은 멋들어진 말을 했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버틸 수가 없어서, 잘 해낼 수가 없어서 도망친 것뿐이었다. 도망은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10대 후반에는 연기학원에 가거나 연기 과외를 받았었다. 수업은 보통 짧은 독백을 연습해서 발표하는 형식이었는데, 내가 받는 독백의 인물은 대부분 창녀거나 성녀거나 악녀였다. 혹은 남자 주인공의 민폐 여자친구이거나 엄마였다. 처음엔 그것을 연습하고 발표하면서 별다른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연습했고, 심지어는 열심히 했다. 


한 번은 여자 청소년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선생은 그 역할이 또래 남자애를 유혹하는 역할이니 요염한 액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을 그 남자애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 선생은 연습실의 불을 모두 끄고는 의자에 앉아서 나를 불렀다. 내가 머뭇거리자, 이것도 못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연기를 하려고 하냐며 다그쳤다. 여배우는 대담해야 한다고. 끼가 있어야 한다고. 남자를 유혹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진짜’라고 생각하라면서, 진실된 연기를 해보라면서, 자신의 신체를 만지며 유혹해 보라고 했다. 불이 꺼진 어두운 연습실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후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2018년 2월, 23살의 겨울방학. 간신히 몸을 누일 수 있는 크기의 자취방에서 일어나,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로 걸어갔다. 학과에서 맞춘 쓸데없이 비싼 롱패딩(40만원이 넘었다)을 입고 비틀비틀 걸어갔던 게 기억난다. 병원에 도착해서 만난 의사 선생님의 첫 한마디는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였고, 그 한마디에 나는 아이폰 메모장에 미리 적어둔 메모를 읽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손톱 옆의 살을 피가 날 정도로 계속해서 물어뜯는 것’ ‘새벽 늦게 아침 해가 떠도 잠들지 못하는 것’ ‘혹여나 잠이 들면 20시간은 넘게 잠들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 ‘책을 펴서 읽으려고 하면 글자들이 읽히지 않는 것’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면 숨이 막히는 것’ ‘며칠 사이에 체중이 8kg이 줄어든 것’ ‘두 달 동안 하혈을 하고 있는 것’ ‘누군가 내 전화번호를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할 만큼 기억력이 줄어든 것’. 이런 항목들을 10가지 정도 더 말하고 선생님과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그 뒤에 약을 처방받고, 바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역시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그대로 학교에 갔다.


겨울방학에도 아침 8시까지 학교에 가야 했다. 방학 공연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연습은 선배와 교수한테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학과의 정해진 인사법은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혹은 교수님. 00학번 000입니다.”. 이 인사는 학과의 정해진 규칙 중 하나로, 복도나 학교 안에서 자기보다 윗사람이라고 정해진 대상을 만나면 무조건 달려가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해야 했다. 윗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 학번은 다음날 바로 전체기합을 받았다. 전체기합의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학번 모두가 연습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그 사람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자세를 유지하는 것. 혹은 차렷 자세로 아침부터 밤까지 서 있는 것. 그런 기합들이 끝나고 나면 선배들은 말했다. ‘우리 때는 더 심했어. 니들은 편하게 지내는 거야.’ 마치 얻어맞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기라는 듯한, 이런 건 폭력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몇 학기 동안 학교 공연에 참여하며 분석한 결과가 있는데, 학교 공연에는 여성이 옷을 벗거나 폭행당하는 장면이 항상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겨울방학 공연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그날은 유독 괴로운 날이었다. 교수는 공주 같은 여성이 도적 같은 사내한테 폭행당하는 장면을 계속해서 반복시켰다. 그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연습실의 한 가운데에서 그 장면을 반복해야 했고, 나머지 다른 학생들은 앉아서 그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연습실에 앉아있었다. 여성 배역을 맡은 학생이 주저하자 교수는 ‘여배우는 색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앞으로 연기 할 수 있겠냐.’ 말하며 언성을 높였고, 남성 배역을 맡은 학생에게는 상대의 옷을 더 거칠게 벗기라며 지시했다. 솔직히 나는 그 지경에 이르기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답답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연습실을 뛰쳐나가서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변기를 붙잡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뒤따라온 동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이 이따가 사무실로 오래.”


사무실에는 가지 않았다. 그 뒤로 곧장 자취방으로 도망가서 잠들려고 노력했던 것만 기억난다. 물론 자취방에 있는다고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 연극계 성폭력 뉴스가 계속해서 떠다녔고, 방금 순간까지도 나는 그 속의 방관자였다.



대학 자퇴 전, 1년 동안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모든 시간을 자취방에 누워서 보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처방받은 정신과 약은 꼬박꼬박 먹었다. 그 짓거리를 1년 동안 반복하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정신과 약 수십 알과 알코올을 먹고 잠들기도 했는데, 눈을 뜨니 응급실이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하얀 천장을 보고 있었는데 요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도망다녔는데도, 연기가 하고 싶다고.


 「지금껏 남자 청소년 중심의 이야기를 읽거나 보고 자라며 공감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톰, 홀든, 해리포터, 스파이더맨이 되었으니까요. 결코 그들의 여자 친구나 엄마가 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민폐라며 미워했던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현실에선 민폐 여자 친구나 엄마 역을 맡아야 하는 여배우들이 존재합니다. 또 상상 속에서 남자 청소년이 된 저도 존재하지요.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

_희곡 ‘좋아하고 있어’, 작가노트


그렇기에 하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약을 삼켜 먹으며, 언젠간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지기를 바라며. 미친 듯이 도망치다가도 뒤돌아서 한 방 먹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나는, 그렇게나 도망을 다녔으면서도 계속해서 연기를 한다.





듣는 글. ‘도망의 이력’ _ 모호   ⓒ모호



발행일. 2022.04.20 | 글감.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모호 (고보민)


나는 모호 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는.


배우

그리고

광대입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쓰고, 연출을 하고

그리고 연기를 하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현재는 연극치료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어딘글방] 이 글은 선언문이 아닌데요, _ 발가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