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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재 Nov 15. 2023

낭만적인 임대인의 어느 평온한 월요일

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날씨 맑음

여기는 이탈리아 피렌체. 올해는 나의 안식년이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피렌체 한 달 살기’를 하러 일주일 전 이곳에 홀로 왔다. 출근하고 등교해야 하는 남은 가족은 같이 오지 못했다. 아니, 실은 나만 오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구애받고 싶지 않은 평온한 한 달을 보내고 싶었기에.     


아이들을 한 달만 남편에게 부탁했다. 평소에도 육아 동지로서 역할을 잘해주는 사람이라 이러한 부탁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본인에게도 나와 같은 안식월을 제공해 달라 하였다. “그럽시다. 이제는 우리도 혼자만의 긴 시간이 한 번쯤 필요한 듯해요.” 흔쾌히 오케이를 외치고 바로 항공권을 결제해 28인치 캐리어에 짐을 싸 홀연히 한국을 떠나왔다.     


큰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5학년, 작은 아이는 2학년이다. 스스로 제 할 일 몇 가지는 한다고 하지만 돌봐주는 누군가의 손길이 계속해서 필요한 법이다. 남편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혹여 몰라 친정 부모님께 간간이 집에 들러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한결 더 마음이 놓였다.     




나의 세 번째 책은 벌써 6쇄에 들어갔고, 네 번째 책을 내자는 출판사 연락이 여러 군데에서 온다. 어떤 내용을 담아 어느 출판사와 계약할지는 이번 여행에서 찬찬히 생각해 봐야겠다. 일단 이번 ‘피렌체 한 달 살기’에 대해 써 볼까? 나처럼 초등생 자녀와 남편을 두고 안식월을 외치며 홀로 이탈리아로 떠나온 유부녀가 얼마나 있을까? 흔한 소재는 아닐 듯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며 알게 된 점 중 하나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지난 5년간 수련을 통해 글쓰기의 묘미를 이제야 조금씩 맛보고 있다.   

   

지난달 14년간 다니던 회사를 사직했다.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했다. 남들은 섣부른 판단이라 하였다. 하지만 더는 회사에 얽매여 감정 노동하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고 싶은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5년 전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그때 나는 이제 막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 연습을 하는 햇병아리였다. A4 2매 분량을 쓰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리고, 비문과 어색한 표현을 바로잡는 데에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발행 버튼을 쉬이 누르기도 힘들었던 내가 이제는 반나절이면 꽤 괜찮은 글 한 꼭지는 거뜬히 쓰는 사람이 되었다. 40대 전반기 치열했던 5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난 5년은 내 이름 뒤에 붙은 ‘작가’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도록 단련하는 시간이었고 작은 하루가 모여 단단한 나를 만들었다. 5년 전 나는 지금의 나를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아침 11시. 한국에서 전화가 온다. 휴대전화를 보니 건물 상가 임차인이다. 임대 재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임차인은 젊은 신혼부부인데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맛도 뛰어난 데다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한 덕에 인기가 좋다. 게다가 가격까지 합리적이라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젊은 부부 사장님은 부지런히 늘 좋은 재료를 공수해 와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열심히 사는 그들을 볼 때면 15년 전 힘들었던 신혼 시절이 생각나 마음이 흐뭇하다. 이 가게 덕분에 우리 건물도 더 유명해지고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는데, 이러한 임차인과 내 어찌 재계약을 안 할 수가 있을까. 나로서는 오히려 고마웠다. 외국이라 길게 이야기 나눌 수 없으니 한 달 후 다시 한국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포도주 한 병 들고 가서 사업 번창을 기원하며 계약서를 즐거이 작성하리라. 나는 낭만적인 임대인이니까.     




며칠 전에는 카프리섬 푸른 동굴 일정이 포함된 이탈리아 남부를 다녀왔다. 15년 만에 다시 만난 지중해는 눈물이 날 만큼 푸르렀다. 여전히 아름다운 지중해. 드디어 이곳에 다시 왔구나. 에메랄드빛 바다는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법이다. 포지타노에서 며칠 지내며 지중해를 좀 더 느껴볼까. 홀로 떠난 자유로운 여행이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좋다.     


언젠가 피렌체에 다시 온다면 꼭 두오모 성당이 보이는 숙소에서 묵으리라 다짐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결국 그 소원을 이뤘다. 조식은 훌륭했고 침대는 푹신했으며 창문 밖 풍경은 아름다웠다. 처음 봤던 그때처럼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두오모를 온종일 보고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자니 내 인생에 다시 온, 이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을 믿을 수 없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느 날은 카페에서 글을 쓰다 고개를 들어 문득 보게 된 두오모가 아름다워 종일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늘도 카페에서 종일 글을 썼다. 일몰 시각을 확인하고 마지막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노트북을 덮고 나는 미켈란젤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갖가지 언어에 둘러싸인 사람들에 섞여 한 걸음씩 돌계단을 오른다. 점점 보이는 피렌체의 정경. 이번 피렌체 한 달 살기 중 아껴둔 오늘이다.

그래, 이거였지. 이 풍경, 이 향기, 이 마음.

일몰을 보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다. 가족이 생각난다. 한국에 있을 아이들에게 편지를 한 통 쓴다.   

  

‘얘들아, 잘 있니? 엄마는 오늘 피렌체에서 제일 멋진 미켈란젤로 언덕에 왔어. 여기 좀 봐. 노을이 정말 멋지지? 엄마가 15년 전 이 언덕에서 지는 빨간 노을을 보며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단다. 눈물도 조금 흘렸었지. 그때 그 아련함이 오늘 엄마를 이렇게 피렌체로 다시 이끌었나 봐. 죽기 전에 꼭 한번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거든.     


너희는 엄마가 보내 준 사진과 영상으로만 이곳을 접하겠지만, 지금 엄마가 느낀 이 감동까지 온전히 느낄 수는 없을 거야. 여기는 직접 눈으로 봐야만 하는 곳이거든. 엄마가 15년 전 느낀 유럽은 처음이라 모든 게 좋았는지도 몰라. 너희는 엄마처럼 신혼여행에서 첫 유럽을 경험하지 말고 그전에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느끼길 바란다.     


얘들아, 이제 엄마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이탈리아 1년 살기’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 해. 그 시간 동안 엄마는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쓸 거란다. 5년간 글을 쓰며 엄마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됐어. 그래서 엄마는 이제 남은 인생을 훨훨 새처럼 날아가듯 살고 싶어. 혹시 너희도 엄마와 함께하고 싶다면 말해줘. 잠시지만 기꺼이 여행에 동참하게 해 줄 테니.

얘들아, 보고 싶구나. 곧 만나자. 사랑해.’


[모든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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