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사의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강백호일 수밖에 없다
1.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나름 꽤 재미있게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2. 송태섭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새로운 이야기의 포석을 까는 건 너무나 좋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나 매력은 좀 덜 부각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처럼 좀 더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는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3. 특히 산왕전은 북산의 주요 캐릭터들이 모두 각자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는 경기라서 그 부분들이 짧게 표현되는 것이 약간 아쉬웠다. 송태섭뿐 아니라, 넘사벽의 고교 최강팀을 만난 북산의 주전 멤버들은 모두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니까.
4. 채치수는 리더로서 자신의 자질을 스스로 의심하고, 서태웅은 에이스로서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며, 정대만은 그동안 막 살아온 인생의 후과를 바닥난 자신의 체력으로써 마주한다.
5. 그렇게 모두가 머릿속으로 자신의 한계와 상대의 탁월함을 되뇌이고 있을 때, 그 흐름을 바꾸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 강백호’의 열정이었다.
6. 모두가 이런저런 계산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오로지 열정과 에너지로 일단 부딪히고, 달려들고, 들이대는 강백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고,
7. 그 모습을 본 동료들은 그제서야 생각이 아니라, 경기에 집중한다. 그렇게 송태섭은 속도로 존 프레스를 뚫어내고, 정대만은 정말 불꽃처럼 자신의 모든 힘을 불태우며, 서태웅은 동료를 활용하기 시작하고, 채치수는 다시 팀의 기둥으로 우뚝 선다.
8. “왼손은 거들 뿐”이 아니라, 풋내기 강백호가 동료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운 셈.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북산은 더욱 강한 팀이 된다. 이 과정을 보면서 이 서사의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강백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9. 오로지 열정으로 최강팀을 상대로 경기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건 풋내기 강백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강백호가 늘 말하는 ‘천재’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계산과 생각만 하지, 자신을 쏟아붓지는 않으니까.
10. 그리고 언제 봐도 감동스러운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라고 강백호가 안 감독에게 물어보는 장면을 보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11. 사람들은 전성기나 영광의 시대를 탁월한 성취를 얻은 순간들로 생각하지만, 어쩌면 ‘진정한 영광의 시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도전하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12. 그렇게 “난 지금입니다”는 강백호의 대사는,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붙잡고도, 그리고 미래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무식하게 달려드는 강백호의 캐릭터를 너무 잘 드러낸달까.
13. 그러면서 강백호가 참 멋진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나은 성과를 생각하며 “나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기 마련이라서.. “저에겐 지금입니다"라며 오로지 열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14.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슬램덩크에 지금도 열광하는 이유 또한 어쩌면 어설프고 모자라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달려들고 싶은 욕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순간을 혼자가 아니라 멋진 팀으로서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이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은 아닐까?
15.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자신의 온 열정을 다 쏟고, 그 과정을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순간이 누구에게나 영광의 시대일 테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영광의 순간을 늘 마음속으로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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