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가 없다면서 왜 다들 살아있나요?
“왜 사세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뜸 이렇게 묻기는 어려웠다. 말을 나름대로 고르고 골라 내가 내뱉은 말은 “살아가는 이유가 뭐예요?”였다. 이 질문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에겐 조금 더 깊은 속내를 말한다.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왜 죽으면 안 되는지. 왜 자살하면 안 되는지. 왜 자살하지 말라고 하는지. 왜 자살은 ‘나쁜’ 생각인지. 정말 자살은 나쁜지, 나쁘다면 왜 나쁜지.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이 질문(“살아가는 이유가 뭐예요?”)을 들었을 것이다. 하물며 사진과 인터뷰 작업을 위해 처음 만난 모델분들, 학교에서 심리학 수업을 하시는 교수님께도 여쭤볼 정도였으니까. 북토크 같은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만나 뵌 분들께도 이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정말 다양한 답변을 들었다. 질문을 하면서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질문에 정답이랄 건 없다. 그럼에도 묻고 싶었다. 분명 <궁금증>은 이 질문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다. 궁금하다기보다는… 나에게는 <필요>에 가까웠다. 이 삶을 어떻게든 지속시킬 마땅한 핑곗거리가 말이다. 그게 없으면 당장이라도 콱 죽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여러 번 죽고자 했고, 나는 생존에 성공했다)
이 질문을 듣고 어느 누구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라고 했고, 다른 누구는 그냥 산다고 했다. 또 어느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산다고 했고, 다른 누구는 아직 못 해본 게 많아서 산다고 했다. 또 (나 같은 정신건강 분야의 격렬한 비전문가가 보아도) ‘정신건강전문가’ 같아보이는 분들이 한 답변은 신기하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대개 비슷했다. 삶의 이유는 없다고. 하루하루 산다고. 삶의 이유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난 이 답변들을 들으며 허탈감을 느꼈다. 살아야 하는 이유조차 없는데,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 끔찍한 하루들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걸까?
안다. 그 순간에도 분명히 난 알았다. 하루를 살아가게 만드는 건 큰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행복과 안온을 느끼고, 그로 인해 쫌쫌따리 삶을 살아간다는 것. 안다. 알고 있다. 삶의 이유라고 콕 집어 말할 건 없다. 난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삶의 이유가 정말로 없다는 말은 그만 해주어도 된다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사소한 행복과 안녕 따위로 하루들을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 아팠다. 정말 너무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살 수가 없었다. 살 수가 없었다니까.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따지면 마이너스가 너무 컸다. 벅차게 괴로운 이 하루들을 견딜 바엔 죽는 게 몇 배는 나아보였다. 자살하는 게 최선 같았다. 그래서 그 순간 나에겐 절실히 필요했다.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사실 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날 설득하는 데에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