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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마 Jul 17. 2024

나는 왜 자살하려 했는가

연재를 멈췄던 네 달간의 근황과 사고의 흐름

  2024년 4월 27일 새벽에 나는 자살을 시도했고,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응급실로 갔으며 보호자인 언니가 왔었다. 그냥 상처 잠깐 치료하러 온 건데 굳이 보호자까지 불러야하나, 싶었던 나는 "보호자를 꼭 불러야 해요?"라고 나는 물었고 그 질문에 단호히 불러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캡모자를 쓴 언니가 왔다. 나는 너무 졸렸는데 자꾸 사람들(의료진)이 깨웠던 기억이 얼핏 난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손목 상처를 봉합하고 집에 왔던 것 같다. 내 방 바닥은 피가 굳은 흔적들로 가득했다. 어찌저찌 다음 날 학교도 갔다. 그 다음 날은 가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부터 한 달 가량은 계속해서 입원을 하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병원을 옮겼고 옮긴 병원에선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대학 병원에 가서 입원하라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그 병원을 다니고 있다. 학교에 제출하려고 뗀 응급실 통원증명서엔 약물중독과 손목열상, 자살관념 등이 적혀있었다.


  네 달이 지난 지금, 왼쪽 손목엔 꽤나 짙은 흉터가 남아있다.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필연적으로 '왜 자살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온다. 나에겐 이런 거였다. 여기 앞에 10장의 쪽지가 들어있는 두 개의 박스가 있다고 치자. A 박스와 B 박스. A 박스 안에는 꽝 쪽지가 10개 있고, B 박스에는 5개의 꽝 쪽지 그리고 나머지 5장의 당첨 쪽지가 있다. 그럼 당신은 어느 박스를 선택할 것인가?

  아마도 백이면 백 전부 B 박스를 선택할 것이다. A 박스에서의 당첨률은 0%이고, B 박스에서의 당첨률은 50%니까. B 박스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게는 삶과 죽음이 이 박스 고르기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 당첨 쪽지는 대강 '행복' 비슷한 거였다. A 박스는 그대로 '사는' 것, 그리고 B 박스는 '자살하는' 것이라고 쳤다. 조금 더 풀어서 나의 그 당시 사고를 설명해보자면, 그대로 살면 절대로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자살하면 행복할 수도 있고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나는 죽어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다는 판단 하에 50% 정도의 확률로 정했다) 자살을 하는 건 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건 앞으로 사는 것에 행복은 없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오만한 확신과 잘못된 착각을 반박해나가야 할 차례다.










  더 살아가는 과정 중에 행복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은 사실 경험적으로도 쉽게 반박된다. 나는 가끔 행복하고 자주 죽고 싶은 편이다. 그런데 그와중에 확실한 건 행복한 순간이 가끔이라도 '있다'는 것이다. 행복이 조금 있다고 왜 꼭 살아야 해요?'라고 물을 수 있다(사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대개 내가 본 행복한 사람은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난 죽어본 적이 없기에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다만 살아보기는 한 사람으로서 행복은 이득이라는 것 정도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저버리고 돌아서는 것, 즉 자살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어떻게든 살아남아 행복의 총량을 기꺼이 누리고 죽는 것이 가장 이득 아닐까? 사실 당첨 쪽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A 박스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행위는 정말 어쩌면 비합리적인 방식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 이제 이런 의문이 든다. 행복의 총량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이 상황을 이제 멈추고 싶은 건데(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생각이다), 당신이 나더러 죽지 말라고 감히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상대에겐 무어라 답할 것인가? 내가 자살하려 했던 두 번째 근거인. '잘못된 착각'을 반박할 시간이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어본 적이 없기에 죽음 이후는 아무도 모른다. 반대로 삶은 모두가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무경험자와 유경험자 중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냐는 질문이다. 당연히 이것 또한 백이면 백 유경험자를 선택하겠지, 라고 판단했다면 약간은 틀렸다. 나는 죽음 무경험자(나자신)의 말을 더 신뢰하고 자살하려 했다. 무경험자와 유경험자 중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냐는 질문은, 죽음 무경험자가 말하는 "죽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말과, 삶 유경험자의 "살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말 중에 고르라는 질문이다. 다른 경우에 우리는 모두 유경험자의 말을 더 쉽게 믿겠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선택지에 놓였을 때에는 쉽사리 고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삶 유경험자의 말을 믿고 앞선 문단처럼 행복의 총량을 누리는 것이 가장 이득일 것이라는 결론을 오늘은 우선 지어본다.







  사실 이것 이외에도 나에겐 자살을 하는 게 낫다는 나름대로의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서 그것들을 찬찬히 꾸준히 반박해나갈 것이다. 어쨌든 지금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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