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향한 '미련'에 대한 고찰 (1)
끈질긴 질문과 끈적한 답변.
"왜 살아요?" "아직 못해본 게 많아서요."
그럼 다 했으면 자살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나의 추진력 그리고 원동력의 원천을 물었다. 나는 매번 그 질문에 같은 답을 했다. 내 모든 원동력은 죽음으로부터 온다고. 다수가 이 답변을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거기에 대고 어영부영 덧붙이는 부가 설명은 이런 거였다.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내일 죽는다면 오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하는 그런 거. 그러니까... 저한텐 그게 매일인 거예요. 내일 어떠한 이유로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면 사실 오늘은 두려울 게 없잖아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거잖아요. 그래서요. 그래서 저는 하고 싶은 거 다 했고, 하기 싫은 것 다 안 했어요. 그게 제 모든 작업과 흔적들의 원동력이에요. 죽음.
저는 언제 죽어도 이제 아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요. 미련이 없어요.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차에 치여서 죽으면 그런가 보다, 오늘 밤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자살하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뭐.
'무언가를 해야 해서 살아야 한다'는 문장으로 나를 설득하기엔 이미 글렀다. 그 문장의 효용은 다 떨어진 지 오래다. 어차피 죽으면 다 쓸모없다. 지금 내가 너무 괴로워서, 난 이제 하고 싶은 걸 다 해서, 더 이상 하고 싶은 건 없어서 그래서 죽음을 결심했다면? 어차피 다들 죽는데, 난 그냥 좀 더 빨리 죽고 싶다고. 앞으로 더 있을 더 수많은 역경들을 상대하는 짓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면? 사실상 내 생각은 이제 다 필요 없고 죽음만 달라는 거였다.
근래 중간 정도 무게의(?)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적당히 죽고 싶은, 그런데 죽지는 않았던, 그렇다고 살만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죽을 것 같지도 않았던, 그런데 제법 죽고 싶은. 요즘 내가 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이곳에는 적을 수 없지만 갖가지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그 자살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나씩 리스트가 지워지는 것이다. 이거로는 쉽게 죽지 못하고, 이거로도, 아 이건 너무 아플 것 같은데, 아 이건 어떨까(혼자 이러고 앉아있는 것이다).
죽음은 사실상 어렵지 않다. 삶과 죽음은 물리적으로 한 발자국 차이니까. 그저 내딛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못 내디뎌 여태 살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꾸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 쉬운 걸 못하니까.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있다. 자살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에 반하는 것이기에 그리 옳지 못하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본능적인 생존 욕구를 과연 '삶에 대한 미련'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다. 자살하고자 하는 인간(첫 번째 관찰대상 : 나)은 죽고 싶어하며, 죽음의 과정에서 수반될 통증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다수가 그 두려움을 보고는 그것에 '삶에 대한 미련'이라는 이름을 붙힌다. 무서워한다는 건 더 살고 싶은 거라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아니 난 살고 싶은 게 아니고 그저 내가 건물에서 떨어져서 느낄 고통이 싫은 거야'라고 생각했다.
스위스에 안락사 캡슐 '사르코'가 곧 사용될 전망이라고 한다(나는 이걸 인스타그램 모 매거진에서 보고 그 게시물을 저장까지 해 놓았다).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안락사 캡슐이 상용화된다면 자살률은 올라갈까, 떨어질까?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이 애초에 존재할까? 그게 나라면?
아니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미련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그 말에 온전히 동의할 수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나의 삶에 대한 미련인지 뭔지를 어떻게든 증명하며 이번 시리즈를 이어나가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