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죽고 싶으면 어떡해요
어떤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죽고 싶은 순간이 있어도 막상 30분 뒤에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거라고. 30분 뒤에 생각해도 똑같이 죽고 싶으면요?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생각해도 똑같으면요?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똑같이 죽고 싶으면요?
자살을 '미루는' 행위의 장점을 이야기하려면 그전에 이야기하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자살을 미루면 정말로 자살하고 싶지 않아지는가, 라는 점이다. 나는 그간 이 문장에 수많은 물음표를 던져왔다. 서두에 적은 것처럼 말이다.
유퀴즈에서 어느 정신과 교수는 자살 충동을 느끼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10분 정도 소요된다고 말했다. 자살 충동은 밀물과 썰물 같은 것이어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고, 정신과적 응급실에서는 자살하고자 하는 그 충동이 잦아들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라고.
어떠한 충동이 들 때에는 늘 그 무언가를 해 버리고 싶어진다. 내가 느껴왔던 숱한 자살하고자 하는 충동, 그리고 자해를 하고자 하는 충동들도 그랬다. 나는 늘 그 충동에 지는 편이었다, 라고 적다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니 마냥 지기만 하는 편은 아니었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름대로 확실한 건, 자해를 하고자 하는 충동들엔 자주 지는 편이었다. 나는 그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해쳐왔다(물론 이곳에 자세히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게 뭐라고 방법들을 연구하고 고심하고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일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충동이라는 건 참 웃기는 단어라, 그 당시에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충동들을 뒤로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온 나에게 늘 따라붙었던 건 죄책감이었다.
스스로를 해쳤다는 죄책감. 나는 아직도 변하지 못했다는 또 나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죄책감. 이 끔찍하게 끈적한 죄책감의 근원은 어디일지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죄책감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죄책감은 항상 시간차를 두고 충동에 따라붙었다. 이 말은 곧 나는 나를 해하거나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시간차를 두고 따라붙는 죄책감은, 자살충동이 일시적이라는 것에 대한 제법 그럴싸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결론적으로 모두가 읊조리는 말을 자꾸 나도 따라하게 된다. 자해 충동은 그리고 자살 충동은 밀물과 썰물 같다고. 들어오고 나가고, 다시 들어오고 나가는 것. '나가면 뭐해요 다시 들어오는데?'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데?'라고 반문하고자 노력해본다. 일시적인 것을 영원불변한다고 착각하고 바꿀 수 없는 결정을 내리기엔 조금 아깝지 않은가(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소중하다거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나는 아직 한참 모른다.)
그냥 조금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해 보자는 것이다. 잠깐 내리는 소나기에 경주를 멈추기엔 조금 아깝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게 잠깐 내리는 소나기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냐는 말에,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소나기에 따라붙는 죄책감을 근거로 들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수없이 깊은 충동들을 밀어내며, 아니 정확히는 밀어낸다기보다는 휩쓸리며 충동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 외에 자살을 '미루는' 행위가 가지는 장점은 여럿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다루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