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
"제 삶은 결국 자살로 끝날 것 같아요."
내가 상담 선생님께 자주 하던 말이다. 우리는 이번 주에 자살을 미루는 행위에 대한 장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었다. 그런데 자살을 미루는 행위의 의미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삶을 살아감에 있어 어떠한 의미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자살할 이유만 자꾸 떠오른다면? (사실 며칠 전까지의 내가 그랬다. 본 시리즈의 첫 화에도 적었다시피 이 시리즈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에 제법 큰 목적을 두고 있기에 이번 화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내가 종종 하던 생각이다(사실 아직까지 이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살 이유가 없는데, 그래도 자살을 하면 안 되나? 이 질문에서부터 촉발된 나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집착적인 질문에 어떤 분이 이렇게 답했다.
"죽을 이유를 물었을 때 답할 말이 없는 것이랑 똑같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죽을 이유를 물었을 때 답할 말이 있는 나는 죽어도 된다는 것인가?
그 전에 내가 죽을 이유를 나열한 것들을 살펴보자.
<소마가 자살할 이유>
1. 삶에 의미가 없어서
2.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겠어서
3. 나아진다는 희망이 없어져서
4. 버티는 것에 진절머리를 느껴서
5. (기타 등등...)
여기서 첫 번쨰 이유인, 삶에 의미가 없어서 자살하고 싶다는 말은 사실 웃긴 말이다. 모든 것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라면 죽을 의미도 잃었을 터이고, 그렇다면 살 이유도 없지만 마땅하게 죽을 만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죽고자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라는 두 번째 이유가 자살이라는 답변으로 귀결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문장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나아진다는 희망, 에 관해서는 할 말이 좀 있다. 나는 대략적으로 열다섯 살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껴왔는데 그 시기엔 무언가 미래에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더 나이를 먹으면, 혹은 어른이 되면, 혹은 독립을 하면, 혹은 대학교에 가면... 나는 더이상 죽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그런 헛된 거품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나는 지금까지 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나아진다'는 것의 정의를 살펴야 한다. 나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나?
아니다. 우선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 봐도 나는 꽤나 나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자살할 명확한 방법을 구상하고 스스로를 해하는 정도가 심해지는 나자신을 보며 나는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 헷갈린다. 하지만 나의 생존은 이것들의 반증,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내가 악화되기만 했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래, 악화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나아진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자.
버티는 것에 진절머리를 느끼는 것은, 앞선 세 번째 이유와 비슷하다. 계속 버텼는데 나아지지 않으니까. 난 도대체 어디까지 버티기만 해야 하나 싶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버티지 않는 삶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자살 충동을 버티며 사는 건 아니잖아요. 또다른 하지만, 그럼 죽은 이후에는 버티는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죽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3화에서 다룬 내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살은 고통의 합리적인 대처법/도피법이 아니다.
오늘의 글은 단순히 (자살충동에 빠진 최근의)나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었다. 읽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로 오늘의 미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