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향한 '미련'에 대한 고찰 (2)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단어 '미련'의 사전적 정의다.
하지만 대개 이런 '미련'은 자살을 결심한 사람을 삶의 방향으로 꼬드기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 많은 이들은 인간의 본능적 생존 욕구에 '삶에 대한 미련'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더라도 삶을 깨끗이 잊지 못하고 삶에 대해 끌리는 마음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우리의 생존 본능을 과연 삶을 향한 미련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나는 동일시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런 생에 대한 본능을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친다면 한숨이 나온다. 내가 죽고 싶은데, 한 인간으로서 내가 죽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끔찍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나의 본능을 억누르고자 약이나 술의 도움(이라고 해도 과연 되는 걸까?)을 빌리고자 했었고 그 시도는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덧붙여 살아야 하니까 살아야 한다, 는 말 따위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며 이제 나에게는 아-무런 생각의 요동을 주지 않는 문장이다. 마치 '저기 길가에 개미가 있다'는 문장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감정 변화가 있다. '그렇구나' 정도. 동의도 반박도 하고 싶지 않다. 동의하기에도 반박하기에도 지쳤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미련에 대한 재정의다.
지금까지의 아주 짧은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다. 나는 분명 아주 가끔씩 찬란히 행복했다. 아끼는 친구들과 핑크색 노을을 배경으로 장미정원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 내 생일에 보라색 나비 모양 케이크를 선물로 받았을 때, 누군가 나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고양감을 느끼는 대화를 이어나갈 때... (다행히도 이보다 더 많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삶을 향한 '미련'은 삶에 대한 남아있는 끌림이 아니다. 어느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분명히 삶에 끌리지는 않는다. 끌리지 않는데 그저 좋았던 장면을 다시 보고 싶을 뿐이다. 우리 삶을 하나의 영상으로 친다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앞으로 커서를 쭉 당겨서 다시 <플레이>를 누르고 싶은 마음. 거기서 조금 더 가자면 아직 남아있는 영상 뒷부분에 또 그런(행복한)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희망. 다시 한번 그렇게 눈부신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따위의 것은 죽음으로부터 가끔 나를 붙잡는다. 웃기게도. 희망은 힘이 없는 듯하면서도 종종 아주 무겁다. 희망은 힘이 세며 동시에 작은 성냥불 같은 것이라서 자꾸 거센 바람 앞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종종 그 불은 꺼진다. 그래서 난 자살을 결심했었다.
그런데 짜증나게 자살하려고 하는데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생각들은 너무 행복했어서 나에게 미치도록 진한 불쾌감을 불러들였고, 그 순간 나는 욕을 몇 마디 하면서 자살을 미뤘다(다음주에는 자살을 미루는 행위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성냥불이 꺼지면 다른 성냥을 그으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진 성냥은 사실 엄청나게 많은 것 아닐까. 주머니를 열고, 열고, 열어보면 계속해서 나오는 성냥갑들이 있는 것 아닐까(솔직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깝다). 성냥이 다 떨어졌다고 느껴서 자살해야지(누군가는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했는데 웃기게 어디서 자꾸 새 성냥이 나온다(누군가는 이 말에 반박하고자 할 것이다. 남은 성냥 따위 없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당신을 설득할 것이다. 당신에게는 아직 남은 성냥들이 아주 아주 많다고.).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쓰고 보니 다시 한번 알게 된 것. 나는 삶에 대한 미련이 그냥 많은 사람이었다. '미련'이라는 단어를 나만의 방식으로 재정의할만큼 너무 삶이 소중해서, 죽어버리고 싶을만큼 소중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사랑해서. 그래서 살고 있는 건가. 그럼에도 죽고 싶은데, 그래도 살고 있다. 산다. 나는 살고 있다.
다음주에는 그간 자살을 어찌저찌 미뤄온 나의 삶을 바탕으로, 자살을 '미루는' 행위가 가지는 장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