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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May 28. 2024

건조기보다 햇살.


우리 집엔 건조기가 없다. 주위에 써 본 지인들이 하도 좋다고 추천해서 들이려 하다 말기를 여러 번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들일 공간이 애매하기도 했고, 굳이 문명의 이기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이제껏 그거 없이도 잘 살아오지 않았던가. 사실 건조야 햇볕이 제일 아닌가.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레 맘을 접게 되었다. 살려면 진즉 샀어야지. 이제 와서 뭘.ㅋ


 




지난 주말에 이어 이번 주말도 신랑은 양쪽 창고를 정리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는 창고이지만 하나는 복도베란다 옆에 만들어진 비상대피용 공간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도 각종 짐이 들어가며 자연스레 창고 비슷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거기서 끝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물건이 쌓이다 보니 결국은 그 공간을 넘어 복도베란다까지 물건이 나오게 되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시선이 가는 맞은편 베란다라 심히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 신랑의 물건들이라 내가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언젠가부터 그쪽 문을 아예 닫고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친구 집에 차를 한잔 하러 들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친구는 우리 집에선 항상 닫혀 있던 그 문을 활짝 열어둔 채였다. 거기엔 다른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오직 빨랫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위로 전창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온 빛살이 빨래로 쏟아지다 못해 어둑한 복도 바닥까지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 공간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이토록 생경한 풍경이라니...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 거실만큼이나 볕이 잘 드는 곳이 거기였다. 그걸 여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베란다 쪽에 빨래대를 두고 빨래를 말리는 작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우리 집은 큰방 베란다에 빨래를 수 있게 커다란 빨래대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실상 큰방은 볕이 가장 덜 드는 곳이라 이불 빨래가 아니고선 주로 이동형 삼단 빨래대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빨래대는 이리저리 옮겨지는데, 안 그래도 복작복작한 거실 안에서 옮기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와중에 볕이 잘 드는 그곳에 빨래대를 두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날 저녁, 나는 한껏 들떠서 신랑에게 그 얘기를 했고, 신랑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곧 그렇게 만들어주겠다고.


.

.

.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그사이에도 몇 번 더 재촉해 봤지만 신랑은 늘 알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뭐, 할 수 없지. 아마 신랑도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테지. 그렇게 그 일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다 며칠 전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복도에 세워둔 빨래대를 거실 창쪽으로 질질 끌고 가던 중이었다. 빨래가 가득 널린 빨래대가 무겁기도 했고, 이리저리 매번 위치를 바꾸는 게 번거롭기도 하던 참이라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말처럼 그 말이 나와버렸다.


"아~ 건조기는 필요 없는데, 빨래는 햇볕에 좀 말리고 싶다아아아~~"


꼭 신랑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들렸나 보다. 갑자기 신랑이 호기롭게 말을 받았다. 


"알겠어. 내가 거기 다 치워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정말? 정말? 잔뜩 기대하는 추임새를 부러 해 보이긴 했지만 사실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장난처럼 받아치고는 그냥 잊고 말았다. 그런데.....


주말 오전부터 신랑이 보란 듯이 큰방 베란다 쪽 창고 물건을 다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우와-! 서방 진짜 정리하는 거야?"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에 내가 연신 묻자 신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으럼, 내가 빨래 널게 해 준다고 했잖아."






열심히 짐을 꺼내는 신랑을 뒤로하고 나는 아이들과 클라이밍을 하러 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문 앞에 내 키만큼 쌓여있는 박스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 많은 박스들이 그 안에서 나왔단 말인가. 나는 신랑의 테트리스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부터 신랑은 물건들을 되팔 때를 생각해서 웬만한 전자제품 박스들을 거의 보관하곤 했다. 그렇게 한 십 년쯤 창고에 차곡차곡 박혀 있던 것인 만큼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서방, 우리 이사 가는 거야?"


그 압도적인 양에 입을 떡 벌린 채 농을 걸자, 신랑은 땀을 훔쳐내며 맑은 얼굴로 웃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져 나도 그냥 웃어버렸다. 하, 하하.


그렇게 그날 하루를 다 보낸 신랑은 헐렁해진 창고를 내게 자랑스레 보여주며 말했다.


"봐봐, 여긴 이제 끝났고, 담주는 저쪽만 하면 끝나."


오오, 나는 신랑에게 양 엄지를 격하게 치켜세워주었다.


사실 뭐든지 좀 설렁설렁 해치우는 엔프피인 나와는 달리 잇티제인 신랑은 안 하면 안 했지 한번 한다면 진짜 제대로 한다. 어설프게 해놓고 마는 경우는 없다. 그런고로 이번주면 완성된 나의 새 공간을 기대하며 일주일 내내 나는 두근반세근반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주말, 신랑은 작업용 장갑까지 끼고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챙겨 들고 결연하게 비상탈출구 정리에 들어갔다. 이내 쓰레기봉투 쓰지 못할 것들이 꽉꽉 차이고, 쓸 수 있는 것들은 장소를 옮겨 널널해진 큰방 창고에 착착 쌓여갔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신랑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제 다 됐어!!"


그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벌떡 일어나 복도 베란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물건이 다 빠져 텅 빈 베란다 바닥을 열심히 물걸레로 닦는 신랑의 모습 뒤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확보된 비상탈출구가 보였다. 신랑이 일어나자 방금 먼지를 닦아낸 베란다 바닥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꺄아악, 처음 이사 왔을 때랑 똑같아. 우아아아아~~~"


물개박수를 치며 환성을 지르자 열어놓은 베란다창 밖으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깜짝 놀란 나는 큭큭, 신랑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얼른 거실에 세워둔 빨래대로 향했다. 주렁주렁 빨래가 가득 널린 빨래대를 베란다로 옮기며 신이 난 내 입에서 절로 노래가 나왔다. 건조기를 산 것보다 백배쯤은 행복한 기분이었다. 일 년 365일 닫혔던 복도 문은 이제부터 활짝 열려있을 테다. 그 큰 창으로 빛을 들이고, 바람을 들이고, 뻥 뚫린 시야로 초록에 둘러싸인 아파트 전경을 담을 것이다.





깔끔해진 베란다에 빨래대를 옮겨두고 난 뒤로 자꾸만 베란다로 발길이 향한다. 오랫동안 얼마나 꿈꾸던 일인지. 보고 또 봐도 너무 좋아서 연신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그런데 정말 우스운 일은, 나뿐만 아니라 신랑도 괜스레 일없이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신랑은 홀가분한 얼굴로 베란다를 쓰윽 들여다보다 가기도 하고, 공들여 닦아놓은 바닥에 자국이 생긴다며 슬리퍼를 말끔히 씻어놓는가 싶더니, 좀 있다가는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여기저기 물티슈로 닦아대기 시작한다. 저녁 무렵엔 미간에 골을 잡으며 물티슈로 닦아낸 얼룩이 보이네 하길래, 나는 얼른 그의 등을 떠밀어 제 방으로 보내버렸다.


서방, 고마워. 이제 이 공간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내일은 아침 일찍 빨래를 할 생각이다. 이제 빨래가 덜 말라 꿉꿉할 일도, 햇빛에 따라 이리저리 빨래대를 옮길 일도 없다. 오전부터 담뿍담뿍 햇살과 바람을 받으며 말라갈 빨래들을 생각하며 나는 더없는 행복에 잠겨든다.



건조기는 필요 없다.
빨래는 역시 볕이 최고!
그리고 신랑은 우리 신랑이 최고다!!




베란다창으로 보이는 아파트 정경, 산새소리 가득한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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