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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27. 2024

퇴사하고 뭐 하면서 지내?

4. 예상외 변수에 답답한 마음을 갖고 지내

내 퇴사 계획에 아빠의 퇴사는 없었다.

인생사 계획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어느 정도 퇴사 계획이 있었다.


1. 퇴사 후 짧게 여행 다녀오기

2. 늘어지게 잠 자기

3. 운동하기

4. 못 만난 친구들 만나기

5. 도서관에서 치즈 인 더 트랩 웹툰 정주행하기


그런 소소한 목록들이 있었다.

이 계획 그 어디에도 아빠의 퇴사는 없었다.


그런데, '때려치울 거야'가 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빠가 진짜 때려치웠다. 나보다 2주나 빨리.


-


스스로 예민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예민할 줄이야?

나도 나의 예민함에 놀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도도 나의 기상을 알고 자박자박 걸어오는 강아지, 조용한 집안, 작열하는 태양빛, 여름의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려놓고 세수를 한다.

얼음 가득한 컵에 커피를 쪼르륵 붓고 냉동실 문을 열어 얼려둔 베이글을 한 입. 유튜브를 좀 보다가 책을 읽고 운동을 가고 글을 쓰고, 엄마가 퇴근하면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강아지 산책을 가고, 저무는 여름해를 바라보며 '하늘 참 예쁘네'를 중얼거리는...


삶은 무슨


조용한 적막이 아닌 '두 다다다다' '으억' '쑥' '푹' 피가 낭자한 온갖 소음으로 깬다. 도대체, 왜 아빠는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에서 전쟁, 스릴러, 살인 이런 류만 찾아보는 걸까? 도파민 중독이냐고.

아침엔 기분이 일단 저조하다.

저조하다는 표현이 맞나, 아침부터 "꺄 즐거운 하루의 시작!"은 퇴사해도 없는 오프닝이다.

조용히 식탁 의자에 앉아 커피를 호록 마시는 게 티브이 소리가 시끄럽다. 소리 좀 줄이라고 하루에도 여러 번 말한다.


강아지가 더워한다며 동생은 에어컨 상시 가동을 주문했고 그 덕분에 집의 모든 문이 닫혔다. 갑갑하다. 사실 난 에어컨 냉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유의 텁텁하고 꽉 막힌 이 냉기가 싫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에어컨을 안 틀기엔 올여름은 지나치게 더웠으니까.


너무 더워 쉽게 어디 나가지도 못했다. 차를 끌고 나가자니 아빠 차는 신형 카니발, 엄마차를 여기저기 벅벅 긁은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왠지 내키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책을 읽기 위해 ASMR을 틀어도 티브이 소음이 비집고 들어온다. 방문을 닫았으니 냉기도 못 들어온다.

돌돌 돌아가는 선풍기의 소음과 미약한 바람. 아, 열받아 짜증 나


엄마가 오면 소음이 더해진다. 여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냐는 둥, 청소기를 안 돌렸냐는 둥, 투닥투닥 아빠와 일상처럼 투닥이는 소음까지 더해진다.


동생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각자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 집의 원칙은 집에서 노는 사람이 집안일도 하고 개산책도 시킨다. 그게 내 일이 됐다. 아빠는 퇴사 후 무릎 수술을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나의 몫. 무더운 여름, 강아지 하네스를 입히고 7시가 넘어서서 나선다. 애매한 시간. 아, 망가진 나의 시간. 개열받네.


스스로 예민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소음에 예민할 줄 몰랐다.

더불어 나의 시간을 이렇게나 중요시 여길 줄도 몰랐다.


퇴사하고 뭐 대단한 거 하진 않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일상을 어떻게 보낼지 정도는 있었다.

아침에 조용히 깨길 원했지만 탈락.

집안일 역시 내가 알아서 내 시간 패턴에 맞게 하고자 했으나,

'청소기 좀 돌려라' 등 엄마의 카톡에 언짢은 기분으로 시작.

집안일 어련히 알아서 할텐데 하라고 카톡이 언짢다.

마치 공부하려고 앉았는데 '공부좀 해라'말을 들었을 때

확 기분이 상하는 것 처럼 말이다.

에어컨 냉기는 좋지만 텁텁함은 싫고 나가자니 덥고 안 나가자니 답답하고 차 끌고 가자니 저 차는 끌고 버스는 엄두가 안 나고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증폭되는 소음과 증가하는 헤르츠


아, 개 열 받 아 진 짜 돌 아 버 리 겠 네


퇴사 후 어떻게 사냐고요?

스스로 예민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예민할 줄은 몰랐고요

혼자만의 시간이 흐트러져 잔뜩 스트레스를 받았고요

그래서 엄마가 퇴근하면 부리나케 차를 끌고 헬스장으로 도망쳤고

개운하게 씻고 왔는데 개산책 후 한번 더 씻어야 해서 열받았고

나는 조용히 뭔 가 하고 싶은데 꽂히는 TV소리에 머리끝까지 짜증이 차올랐고


진지하게 재취업하면 돈 모아서 독립해야지 라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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