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구두를 꺼내 신지

고개 숙이고 걷는 게 싫어서

by 블레어

20대 초반엔 구두를 즐겨 신었다.

대학교 재학 시절 1년의 기간 동안 운동화를 딱 3번 신어봤을정도였다.

또각또각 소리가 좋았고 한층 높아진 시선이 달가웠다.

뭔가 당당하게 바뀌는 태도도 좋았고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편한걸 찾게 됐다.

높은 힐의 굽이 점점 낮아지고 로퍼, 단화를 지나 운동화로 변모했다.


겨울용 워커를 제외하면 하이힐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준비를 하고 평소처럼 운동화를 신다가

문득

구두를 신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회색 운동화를 내려두고 검은색 굽있는 부츠를 챙겼다.

앞이 얄쌍하게 빠진 부츠에 발을 집어넣고 으라차 일어서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는 아주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 세우고 거리를 활보했다.



최근에 알게된 사실은 내가 자꾸 땅을 보고 걷는다는 것이다.

죄지은 것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지

어딜 갈 때 마다 시선이 땅에 꽂혔다.


그렇다고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걷는 것도 아니었다.

곱게 핸드폰은 주머니에 넣은 채 걷는 건데도 내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괜히 보도블럭의 색을 보고 모양을 보고 길가에 조그맣게 오른 잔디를 보며 걸었다.

시야에 다른 사람의 신발이 밟히면 조심스레 방향을 틀어 마주치지 않게 걸었다.

애써 고개를 들고 걸어도 몇초 안가 나는 다시 바닥을 보며 걸었다.


마치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마냥

고개를 들어선 안되는 사람마냥



거짓말처럼 굽 있는 부츠를 신은 날에는 똑바로 앞을 보며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고개숙이고 피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마주보며 앞머리가 휘날리든 말든 상관없이 걸었다.

무슨 일이든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을 폴폴 풍기면서


겨우 3~5센치 차이였는데

세상을 향한 시야가 달라졌다.


바닥에 딱 붙어 걷는 날에는 두더지마냥 바닥속으로 파묻혔고

바닥에서 조금 떨어져 걷는 날에는 새 마냥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조금의 차이가 자아내는 시선의 방향이 이렇게나 달랐다.

같은 사람, 같은 마음, 같은 태도였을 것인데

단지 그 조그만 차이가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을 천지차이로 바꿨다.


날이 따뜻해지다보니 자연스레 굽있는 부츠는 신발장 한 켠에 고이 넣어뒀다.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선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마치 굽있는 구두를 신은 사람처럼

앞을 당당하게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내딛는 곳은 평범한 곳이다.

헬스장, 카페, 동네 공원, 상점가 등등


발걸음이 향하는 목적지와 상관 없이 애써 고개를 들어 올려 당당한 태도를 모아쥔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자꾸 또 스스로 움츠러들테니


참, 노력하지 않으면 시선조차 땅으로 향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잘못한 것도 죄지은 것도 없지.

아마 지금의 내 상황이 조금 부끄럽고 쪽팔리다 생각해서 그런거겠지.


그게 뭐 어때서

그럴 수도 있는거지.

다 거쳐가는 상황인거지.


다시금 스스로에게 가해졌던 생각에 힘을 뺀다.

그리고 태도에 힘을 준다.


당당하게

시선을 들고

앞을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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