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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드로잉한 것을 모아 독립출판물 <그림솜씨 : 드로잉의 맛>, <그린솜씨 : 계절 드로잉>, <나의 계절은 언제나 봄이었다.>를 만든 후 데일리 드로잉, 여행 드로잉처럼 일기 쓰듯 일상을 그리는 그림 수업을 많이 했다. 내 수업을 찾아온 분들은 대부분 비전공자이지만 그림을 좋아하고 그리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다. 그래서 나는 늘 그림을 가르치기보다는 조금 더 먼저 시작한 사람으로 그림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림을 좋아했고 또 곧잘 그리는 아이였다. 4살 무렵 어린이집과 미술학원이 묘하게 섞여있는 곳에 다니면서부터 나의 미술학원 인생도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 초등학생 미술학원, 중학교 화실, 고등학교 입시미술 학원까지 정말 베이직한 한국 미술 교육을 받으며 화가를 꿈꿨다.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를 전공한 후 지금은 그림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본다면 내가 마치 그림 외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 것 같지만 고3 시절 아무런 정보도, 생각도 없어 엉뚱한 학과에 진학하는 바람에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기까지 꽤 애를 먹었다.
겨우 다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어 작업대 앞에 앉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내 손은 오래전 미술학원에서 갈고닦은 그림 테크닉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미술의 기초를 탄탄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시험 합격을 위해 틀에 박힌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작가로 활동하면서 입시미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여전히 그때 배운 규칙에 얽매이지 않으려 신경을 쓴다.
작가로 활동하는 나조차도 매일 드로잉을 하며 손과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연습을 한다. 남 보기에 멋져 보이는 그림 대신 힘을 빼고 슬렁슬렁 그리는 그림, 내가 좋아서 그리는 자연스러운 그림은 내 일상을 한층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의 클래스 또한 한없이 자유롭게 만들고 싶었다. 나와 그림을 만나는 시간이 좋은 계기가 되어 참가자들이 오래도록 즐기며 그림을 즐길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보통 드로잉 클래스에스 각자 소개를 한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내가 가져간 온갖 재료를 테이블 위에 마구 펼쳐두고 이것저것 마음껏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자! 이제 마음껏 그러 보세요!”라고 하자마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다양한 재료만큼 다양한 직선, 곡선, 모양을 그러 낸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과 천진난만하게 신나 하는 모습들은 정말 사랑스럽다.
누군가는 연필로 시원하게 선을 긋고 또 누군가는 부드러운 오일파스텔로 알록달록한 도형을 그리기도 하는데 이 작은 낙서 한 장에서 그 사람의 성격, 취향, 마음이 보이기도 한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는 모두의 그림이 제각기 얼마나 다른지 보는 것은 언제 봐도 재미있고 신기하다. 이렇게 다양한 재료로 낙서하듯 종이 위에서 놀다 보면 한 두 개 정도 마음이 가는 재료가 나오기 마련! 나중에는 바뀔지 몰라도 지금 내 기분을 표현하기에 좋은 재료, 내 손과 마음에 잘 맞는 재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재료를 만난 후에는 드로잉 짝꿍과 함께 즐겁게 그리기 시작하면 된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재료와 그림 소재, 그리는 방식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미술재료 하면 떠올리는 4B연필, 수채화 물감, 유화 물감 같은 재료뿐 아니라 내 필통에 늘 들어있는 볼펜, 형광펜, 아이의 크레파스, 사인펜 모두 좋은 그림 재료다. 재료를 사기 위해 반드시 화방을 찾을 필요도 없다. 다이소에서 파는 미술 도구로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시험이나 점수를 위한 그림이 아닌,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것은 내게 맞는 재료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이다. 그래야 나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