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의 기적: 평화를 위한 촉매제

만달라 질서 - 동남아시아의 다문명 공동체, 다체제 지역 실험

by 소묘

『The ASEAN Miracle: A Catalyst of Peace (아세안의 기적: 평화를 위한 촉매제)』


동남아시아의 살아있는 증인들


이 책의 저자인 키쇼어 마부바니(Kishore Mahbubani)와 제프리 승(Jeffery Sng)은 동남아시아의 현대사를 직접 경험하고 살아온 증인들이다. 두 사람은 싱가포르의 가난한 동네 오난 로드(Onan Road)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쌓았고, 싱가포르국립대학교(NUS)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들이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쇼어 마부바니는 싱가포르 외교관으로서 33년간 봉직하며 동남아시아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유엔 주재 싱가포르 대사를 역임하며 캄보디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ASEAN의 외교적 노력을 직접 경험했다. 또한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Lee Kuan Yew School of Public Policy) 학장을 지내며 싱가포르의 성공적인 공공정책 경험을 전 세계와 공유하는 데 힘썼다. 그의 경험은 이 책에 이론과 현실을 아우르는 깊이와 통찰력을 더한다.


제프리 승은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서 동남아시아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80년대 초부터 방콕에 거주하며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깊이 이해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전 대통령인 S.R. 네이선과 동남아시아학의 저명한 학자인 벤 앤더슨(Ben Anderson)을 포함한 수많은 동남아시아 정책 입안자 및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풍부한 현장 지식을 책에 녹여냈다. 그는 동남아시아 사회를 잘 이해하는 중국계 싱가포르인으로서, 이 책에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핵심적인 문제의식: 기적을 넘어선 기적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아시아의 발칸반도'라 불릴 만큼 분쟁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던 동남아시아가 어떻게 오늘날 평화와 번영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에 있다. 저자들은 이 기적이 운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ASEAN이라는 지역 기구가 리콴유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의 현명한 결정과 일관된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특히 저자들은 서구의 시각이 가진 두 가지 편견을 비판한다. 첫째, 서구는 ASEAN의 성공을 '비사건(non-event)'으로 간주하며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전쟁과 갈등은 끊임없이 보도되지만, 평화는 뉴스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둘째, 서구는 ASEAN의 강점을 과소평가하고 그 약점만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와 같은 유력 서구 언론은 ASEAN의 공동체 의식을 '빈껍데기'로 치부하며 비아냥거렸다.


저자들은 이러한 편견에 맞서 ASEAN의 세 가지 주요 성과를 강조한다.


50년의 평화: 동남아시아는 1967년 ASEAN 창립 이후 회원국 간의 전쟁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 기구다. 이는 유혈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중동이나 발칸반도와 비교하면 경이로운 성과다.


6억 명의 삶 개선: ASEAN은 회원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특히 베트남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ASEAN에 가입한 지 20년 만에 빈곤율을 50%에서 3%로 낮추는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강대국들의 문명화: ASEAN은 주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경쟁 속에서 중립적인 외교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며, 강대국들이 협력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강대국들은 ASEAN을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ASEAN으로부터의 지혜


지정학적 균형의 중요성: 동남아시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고 번영하는 법을 터득했다. ASEAN은 강대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파트너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한반도 역시 미-중 경쟁의 격화 속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넘어선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 ASEAN이 강대국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쟁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지경학적(geoeconomic)' 기회를 창출한 것처럼, 한국도 이를 통해 경제적, 외교적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공동체 의식과 제도적 역량 강화: 저자들은 ASEAN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로 '대중의 소유 의식 부족'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ASEAN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한국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ASEAN이 미래에도 지속가능하려면 정부 주도의 협력을 넘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 책은 한국이 동남아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경제 협력을 넘어, 문화적 교류와 교육을 통해 상호 이해와 유대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시사한다.


동북아 협력 모델에 대한 성찰: ASEAN이 성공적으로 지역 통합을 이룬 반면, 한국, 중국, 일본의 동북아 지역은 여전히 역사적 문제와 지정학적 긴장으로 인해 협력이 미미하다. ASEAN의 성공은 강력한 리더십과 공동의 목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 동북아의 실패는 리더십과 공동의 목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여준다. 한국은 ASEAN의 사례를 통해 지역 내 협력의 성공 요인들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1. The Four Waves (4개의 파도)


동남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다양한 지역 중 하나이며, 이는 네 가지의 뚜렷한 문화적 파도, 즉 인도, 중국, 이슬람,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만남들은 ‘쓰나미’라 불릴 만큼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파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파도(wave)’라는 비유가 더 적절하다. 이 장은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러한 네 가지 파도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조명한다.


네 가지 파도가 밀려오기 전의 동남아시아는 역사가들이 ‘원시적 야만성’에 머물러 있었다는 과거의 시각과는 달리, 활발한 해양 교역과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500년경부터 이미 인도, 기원전 400년경부터 중국과 교역을 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 화자들은 숙련된 항해사로서 인도양과 태평양을 누비며 마다가스카르에서 뉴질랜드, 하와이에 이르기까지 탐험과 정착을 이어갔다. 특히 말라카 해협은 계절풍을 이용한 동서양 교역의 중요한 교차로 역할을 했다.


The Indian Wave (인도의 파도)


인도의 파도는 기원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 앙코르와트와 보로부두르 같은 기념물들은 인도의 문화적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이 영향은 유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태국 왕실 의식에서 브라만 사제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 등 현대에도 살아있다. 산스크리트어는 권력의 언어로 채택되었으며, 힌두교와 불교 사상이 전파되었다. 이러한 인도의 영향은 본토와 해양 동남아시아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메콩강 하류의 푸난(Funan)과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은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하며 인도의 영향을 깊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인들은 인도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재해석했다. 인도의 문화적 영향이 1,400년 이상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국과 같이 중국 문화의 영향도 함께 흡수한 사례는 동남아시아 사회의 문화적 포용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드러운’ 문화적 특성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딱딱한’ 동북아시아 문화와 대비된다.


The Chinese Wave (중국의 파도)


중국 문명의 영향은 인도 문명과 달리 주로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수 세기 동안 조공 체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동남아시아 왕국들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조공을 보냈다. 이러한 조공 관계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회피하고 중국 시장에 접근하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 또한 이를 통해 국경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전략적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베트남은 1,000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정치적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반면 태국은 중국인 이민자들을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시키며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유산을 동시에 받아들였다. 15세기 초 정화의 대규모 원정은 중국의 잠재력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해양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 아닌 평화적인 외교적 노력이었다. 오늘날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과거의 실크로드를 부활시키려는 것 역시 이러한 역사적 관계의 연장선에 있다.


The Muslim Wave (이슬람의 파도)


이슬람은 평화적인 무역상들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다. 7세기경 수마트라 서해안에 소규모 무슬림 정착지가 형성되었으며, 12~13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무역의 이점, 당시의 강력한 이슬람 왕국들과의 연결, 그리고 신비주의적 이슬람인 수피즘(Sufism)의 매력 등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15세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이 세계 무역을 지배하면서 말라카와 같은 항구 도시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여 상업적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이슬람의 확산은 저항과 현지 문화와의 융합을 겪었다. 발리(Bali)는 힌두교 문화를 지켜냈고,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서는 이슬람이 고유의 애니미즘 및 힌두-불교 전통과 공존하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슬람과 힌두 신화의 공존은 인도네시아 사회가 발전시킨 ‘관용의 문화’를 보여준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5대 원칙인 '판차실라(Pancasila)'는 이러한 관용의 정신을 잘 담고 있다.


The Western Wave (서구의 파도)


서구 문명의 파도는 동남아시아를 정치·경제적으로 완전히 변모시켰지만, 필리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종교와 문화적 기반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서구의 등장은 상업주의와 폭력을 동반했다.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의 이권을 위해 1511년 말라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폭력을 사용했다.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제국주의 세력들은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무력을 행사했다.


19세기 중후반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동남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 시기 유럽의 지리적 갈등이 동남아시아의 국경을 인위적으로 그리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의 국경은 중동의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달리, 기존의 역사적, 문화적 실체를 상당 부분 반영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기적’을 이루었다. 또한 식민 지배는 도로, 철도, 병원 같은 현대적 인프라를 남겼고, 중국과 인도에서 대규모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지역의 인구 구성과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 The ASEAN Ecosystem of Peace (ASEAN 평화 생태계)


동남아시아는 역사적으로 복잡하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아시아의 발칸반도’에서 ASEAN이 어떻게 평화와 번영의 기적을 일구어냈는지는 국제관계 학계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중요한 의문이다. 평화는 갈등과 달리 ‘비사건(non-event)’으로 간주되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장은 ASEAN이 성공적으로 구축한 평화 생태계의 주요 요인들을 분석한다.


ASEAN 평화 생태계의 발전 단계


ASEAN의 발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냉전기인 1967년부터 1990년까지였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한 공동의 두려움이 창립 회원국들을 결속시키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특히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공동 대응은 ASEAN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깊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번째 단계는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부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까지다. 이 시기에는 과거의 협력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ASEAN 공동체가 유지되었으며, 베트남(1995), 라오스(1997), 미얀마(1997), 캄보디아(1999)가 연이어 가입하면서 더욱 포괄적인 동남아시아 공동체로 확대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21세기 초부터 시작된 제도적 발전기다. 1993년 시작된 ASEAN 자유무역지대(AFTA)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고, 2007년에는 ASEAN 헌장(Charter)이 신속하게 채택되면서 ASEAN은 더욱 강력한 지역 기구로 거듭났다.


평화 생태계의 주요 원동력


ASEAN 평화 생태계는 다음 다섯 가지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형성되었다.


첫째, 공산주의에 대한 공동의 두려움이다. 1960년대 동남아시아 창립 회원국들은 내부 공산주의 반군 활동과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위협에 직면했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도미노 이론’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했고, 이는 회원국들이 ‘함께 뭉치지 않으면 각자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공동 운명체 의식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둘째, 강력한 지도자들의 역할이다. ASEAN은 수하르토(Suharto) 인도네시아 대통령, 리콴유(Lee Kuan Yew) 싱가포르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Mahathir Mohamad) 말레이시아 총리, 싯티 사웨실라(Siddhi Savetsila) 태국 외교부 장관과 같은 강하고 현명한 지도자들의 지도력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은 가장 강력한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ASEAN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다른 회원국들이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배려하는 ‘비범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이 미주기구(OAS)를, 인도가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을 지배하려다 실패한 사례와 대비된다.


셋째, 지정학적 행운이다. ASEAN은 냉전에서 승리한 편에 섰고, 1969년의 중소 분쟁과 1978년의 중-베트남 전쟁은 ASEAN의 단결을 강화하는 데 역설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은 과거의 적대적 태도에서 벗어나 ASEAN의 발전 모델을 배우려 했다. 베트남 또한 소련의 붕괴 이후 안보를 위해 ASEAN에 가입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넷째, 시장 지향적 경제 정책이다. ASEAN 국가들은 제3세계의 민족주의적 보호무역 정책을 거부하고, 일본과 ‘네 마리 용(Four Tigers)’의 성공적인 경제 발전 모델을 모방했다. 이들은 자유무역과 개방 시장을 채택하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전쟁과 갈등의 논리가 경제 발전과 성장의 논리로 대체되는 기적을 가져왔다.


다섯째, ASEAN 기반의 지역 네트워크다. ASEAN은 수많은 다자간 회의와 비공식적 교류를 통해 지도자, 장관, 고위 관리들 사이에 신뢰와 동지애를 구축했다. 이 ‘무형’의 네트워크는 ASEAN 공동체를 유지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또한 ASEAN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EAN 지역안보포럼(ARF),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등 다양한 역내 협력 메커니즘의 중심 역할을 하며 평화의 문화를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3. ASEAN and the Great Powers (ASEAN과 강대국들)


ASEAN의 미래는 내부적인 결정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의 외부적인 결정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이 장은 미국, 중국, EU, 인도, 일본 등 주요 강대국들과 ASEAN의 관계를 분석하며, ASEAN이 강대국 간의 지정학적 경쟁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을 강화해야 하는지 조명한다. 강대국들이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ASEAN을 분열시키려 할 때, ASEAN은 장기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ASEAN과 미국: 세 단계의 관계


미국과 ASEAN의 관계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냉전 시기(1967-1989)에는 공산주의 확산 저지라는 공동의 목표 덕분에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ASEAN을 중요한 지정학적 자산으로 여겼으며,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공동 대응은 양측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둘째, 냉전 종식 이후(1990년대)에는 소련의 붕괴로 인해 미국이 ASEAN에 대한 전략적 관심을 잃으면서 ‘거절’의 단계에 들어섰다. 미국은 ASEAN을 더 이상 유용한 동맹으로 보지 않았고,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아시아 금융 위기(1997-98) 당시 미국이 태국에 대한 지원을 망설인 반면 한국을 빠르게 구제한 사건은 ASEAN 국가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겼다.


셋째, 2001년 9/11 테러 이후(21세기 초)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글로벌 동맹국의 가치를 재인식하면서 관계가 회복되었다. 미국은 ASEAN을 다시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보았으며, 다양한 협력 채널을 제도화했다. 하지만 미국 정책은 행정부 교체에 따라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ASEAN은 이러한 미국의 불일치성에 대비하여 섬세하고 교육적인 외교를 펼쳐야 한다.


ASEAN과 중국: 사랑에 빠지는 단계에서 불확실한 관계로


중국과 ASEAN의 관계 역시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ASEAN 창립 초기(1967년)에는 중국이 ASEAN을 ‘반중국, 반공산주의 동맹’으로 규정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둘째, 중-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은 ASEAN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사랑에 빠지는’ 단계로 전환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공동 반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시 중국의 지원, 그리고 중국-ASEAN 자유무역협정(ACFTA) 제안 등은 양측 관계를 급속히 발전시켰다.


셋째, 21세기 두 번째 10년(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커졌다. 2012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ASEAN 외교장관회의에서 중국의 압력으로 공동 성명 채택이 실패한 사건은 이 불확실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은 ASEAN을 분열시키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지만, 단결된 ASEAN이 중국의 평화적 부상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높이고 역내 안정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ASEAN과 유럽연합(EU): 모델과 조언의 관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두 지역 기구인 EU와 ASEAN은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EU는 경제 통합과 강력한 제도 구축 면에서 ASEAN의 모델이지만, 미얀마 문제에 대한 제재와 같은 단기적인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지정학적 지혜가 부족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반면 ASEAN은 미얀마에 대한 제재 대신 ‘관여(engagement)’ 정책을 통해 평화적인 민주주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ASEAN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EU와 달리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등 실용적인 접근법을 통해 협력의 효율성을 높였다. EU는 ASEAN의 지정학적 지혜와 실용주의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ASEAN과 인도: 잠재력과 현실의 간극


인도는 동남아시아와 수천 년에 걸친 깊은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지만, 양측 관계는 잠재력에 비해 아직 미흡하다. 냉전 시기 인도가 소련 편에 섰던 것과 달리, ASEAN은 친미 성향을 띠면서 정치적 긴장 관계가 있었다. 냉전 이후 인도는 ‘동방정책(Act East Policy)’을 통해 ASEAN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경제적 및 지정학적 협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인도는 문화, 경제, 지정학적 세 가지 기둥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하며, 미국과 중국의 경쟁 속에서 ASEAN에 전략적 균형추 역할을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ASEAN과 일본: 냉소주의와 기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줄곧 아시아를 문화적으로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ASEAN의 중요한 통합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아시아 금융 위기(1997-98) 당시 미국에 대한 관계를 우선시하며 ASEAN에 대한 지원을 망설였고, 이로 인해 ASEAN 내에서 신뢰를 잃었다. 이러한 관계의 냉소주의는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모색할 때 ASEAN 회원국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이 ASEAN과 진정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구축하고, 첨단 기술과 같은 자산을 활용해 지역 발전에 기여한다면, 동남아시아는 일본이 아시아 세기 속에서 재평가받고 재관여할 수 있는 중요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4. Pen Sketches (간략한 스케치)


동남아시아는 유럽연합(EU)과 달리 공통된 유산이나 정부 형태를 공유하지 않는 독특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장에서는 10개 ASEAN 회원국의 개별적인 ‘정신’을 탐구하며, 각국의 주요 성과와 도전 과제, 그리고 ASEAN에 대한 기여와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각 나라는 복잡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지만, 이 장은 각국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식욕 돋우는 요리(appetizer)’ 역할을 한다.


브루나이(Brunei)


인구 약 50만 명의 작은 나라지만, 싱가포르에 이어 ASEAN에서 두 번째로 부유하다. 지정학적으로 취약할 수 있지만, ASEAN의 평화 생태계 덕분에 안정적인 환경을 누리고 있다. 영국 식민지배와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제안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며 독립을 지켰다. 싱가포르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행정 및 외교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절대군주제 국가인 브루나이는 석유와 가스 자원에 의존하고 있어 경제 다각화가 시급한 도전 과제이며, 남중국해 분쟁에서 ASEAN의 단결을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다.


캄보디아(Cambodia)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집단학살(genocide)을 경험한 불운한 나라지만, 동시에 멸망 위기에서 프랑스의 보호를 받아 국가 정체성을 유지한 행운의 나라이기도 하다. 시아누크 국왕과 훈 센 총리가 캄보디아 현대사를 이끌었다. 훈 센의 통치 아래 캄보디아는 평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ASEAN 내에서 때때로 마찰을 빚기도 한다. 캄보디아는 중국에 유용한 파트너로 남기 위해 ASEAN 회원국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는 미묘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인도네시아(Indonesia)


인도네시아를 설명하는 한 단어는 ‘회복력(resilience)’이다. 세계 최대의 군도 국가이자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는 수차례의 위기 속에서도 단결을 유지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수카르노(Sukarno)는 민족적 통일성을, 수하르토(Suharto)는 경제적 번영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SBY)는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민족주의, 지하디스트(jihadist) 위협 등 내부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인도네시아의 지도자들이 ASEAN의 가치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ASEAN 성공의 핵심이다.


라오스(Laos)


라오스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통해 독립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보호받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캄보디아나 베트남과 달리 내전으로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1990년대 이후 개방 경제 정책을 채택하며 태국과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노출되었다. 지정학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ASEAN의 강력한 지지자 역할을 하며, 역내 외교에서 능숙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Malaysia)


말레이시아는 현미경으로 보면 민족 갈등, 정치적 혼란 등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동남아시아에서 싱가포르 다음으로 성공적인 경제 발전 기록을 보유한 나라다.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의 ‘비전 2020’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고, 의료 시스템도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말레이(Malay) 인구와 중국계 인구 간의 긴장,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상, 그리고 인재 유출(brain drain)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리적으로 ASEAN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ASEAN의 경제 통합으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국가 중 하나다.


미얀마(Myanmar)


미얀마의 평화로운 민주주의 전환은 ‘ASEAN 방식(ASEAN Way)’의 힘을 보여주는 기적적인 사례다. 서구의 제재와 고립 정책과 달리, ASEAN은 미얀마 군사 정권과의 ‘관여(engagement)’를 통해 중국과 인도 등 강대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미얀마를 보호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와 군부 간의 권력 분점 문제와 로힝야(Rohingya)족을 비롯한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미얀마가 해결해야 할 내부적 도전 과제다. ASEAN은 미얀마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이 나라의 성공적인 정착을 도울 수 있다.


필리핀(Philippines)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이면서도 서구 문화와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독특한 나라다. 스페인과 미국의 오랜 식민 지배로 인해 문화적으로 서구에 깊이 동화되었으며, 이는 때때로 ASEAN과의 관계에서 오해를 낳기도 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정권의 부패로 인해 경제 성장이 지연되었으나, 최근에는 IT 아웃소싱 등 새로운 산업을 중심으로 다시 성장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남중국해 분쟁을 둘러싸고 중국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대통령은 실용적인 외교를 통해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싱가포르(Singapore)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추방당하며 실패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리콴유(Lee Kuan Yew)를 비롯한 강력한 건국 지도자들의 ‘실력주의(Meritocracy)’, ‘실용주의(Pragmatism)’, ‘정직(Honesty)’이라는 세 가지 원칙 덕분이다. 싱가포르는 ASEAN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이며, 여러 ASEAN 이니셔티브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지적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국가로서 ASEAN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으며, 강대국 경쟁 속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


태국(Thailand)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로, 뛰어난 외교적 지혜를 통해 독립을 유지해왔다. 인도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모두 흡수하며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국내적 혼란은 태국이 ASEAN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태국은 여전히 강대국들과 능숙하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ASEAN의 창립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앵커’ 국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Vietnam)


베트남은 1,000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 중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았다. 이로 인해 베트남은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가장 경계하는 역설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딱딱하고’ 굴하지 않는 민족성 덕분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냉전 종식 후에는 과거의 적이었던 ASEAN과 미국에 손을 내밀어 경제 성장과 안보를 확보했다. 현재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아 중국의 영향력에 맞서려는 지정학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베트남의 성공적인 경제 발전은 ASEAN이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5. ASEAN: Strengths and Weaknesses (ASEAN: 강점과 약점)


ASEAN은 2017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했고, 앞으로도 수십 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00주년까지 생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장은 SWOT 분석(강점, 약점, 기회, 위협)을 통해 ASEAN의 현황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다.


강점 (Strengths)


공동체 의식과 신뢰: ASEAN의 가장 큰 강점은 다양성 속에서도 지도자와 고위 관리들 사이에 형성된 '공동체 의식(sense of community)'이다. 수천 번의 공식 및 비공식 회의(심지어 골프를 치는 것까지)를 통해 쌓인 신뢰와 동지애는 회원국들이 심각한 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었다. 예를 들어, 2012년 남중국해 문제로 공동 성명 채택이 불발되었을 때, 인도네시아의 고위 관계자들이 관계 회복을 위해 즉시 나선 것은 이러한 공동체 의식의 존재를 증명한다.


제도적 강화: 2008년 ASEAN 헌장(Charter) 채택 이후, ASEAN은 실질적인 제도적 틀을 구축했다. 연 2회 정상회의 의무화, 상주 대표 위원회(CPR) 설립, 인권 기구 창설 등은 ASEAN을 더 효율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ASEAN-X 원칙(ASEAN-X principle)'과 같은 유연한 접근법을 도입해 모든 회원국이 동시에 합의하지 않아도 협력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강대국의 지지: ASEAN은 강대국들에게 중립적이고 효과적인 외교 플랫폼으로 신뢰받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인도 등 강대국들은 ASEAN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것이 자국의 장기적인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ASEAN 연례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며, 이는 ASEAN의 위상과 영향력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약점 (Weaknesses)


자연스러운 수호자의 부재: EU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반면, ASEAN에는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국가가 없다. 인구와 경제 규모가 가장 큰 인도네시아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지만, 국내 정치적 불안정성과 경제 민족주의로 인해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또한 국내 문제로 인해 리더십을 제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싱가포르와 같은 소국은 리더십을 발휘할 경우 다른 회원국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약한 제도와 재정: ASEAN 사무국의 예산은 EU 집행위원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며, 이는 모든 회원국이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평등 분담(equal payments)' 원칙 때문이다. 이 원칙은 가장 가난한 회원국의 지불 능력에 맞춰 예산이 책정되도록 하여 사무국의 성장을 저해하고 외부 자금에 의존하게 만든다.


대중의 소유 의식 부족: ASEAN 시민들은 조직에 대한 인식이 낮고 소속감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많은 시민들이 ASEAN의 역사, 목적, 심지어 회원국 이름조차 잘 알지 못한다. ASEAN이 정부 주도 조직을 넘어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기 어렵다.


위협 (Threats)


강대국 간의 지정학적 경쟁: 미국과 중국 간의 치열해지는 경쟁은 ASEAN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 남중국해 분쟁이나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과 같은 문제에서 회원국들이 특정 강대국의 편에 서도록 강요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력은 ASEAN의 단결을 해치고 조직을 분열시킬 수 있다.


국내 문제에 몰두하는 지도자들: ASEAN의 리더십은 과거 리콴유, 마하티르, 수하르토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그러나 현재 많은 회원국의 지도자들은 국내 정치적 도전 과제에 몰두하느라 ASEAN 협력에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ASEAN의 발전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잠재적 내부 갈등의 재발: 지정학적 충격이 가해질 경우, 동남아시아 내부에 잠재된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미얀마의 로힝야족 사태나 태국 남부의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은 ASEAN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내부 문제들이다. ASEAN이 약해지면 이러한 갈등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될 수 있다.


기회 (Opportunities)


다자주의의 부상: 전 세계적으로 다자주의가 확산되면서 ASEAN은 지역 협력의 성공 모델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U가 브렉시트와 같은 위기를 겪으며 경직성을 드러내는 반면, ASEAN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방식은 개발도상국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지경학적 경쟁의 혜택: 강대국들이 ASEAN을 향해 경쟁적으로 경제적 협력 제안을 내놓으면서, ASEAN은 투자와 인프라 프로젝트를 유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인도네시아 고속철도 건설을 놓고 경쟁한 사례처럼, ASEAN은 이러한 경쟁을 활용해 회원국들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


아시아 세기의 도래: 중국과 인도의 부상은 동남아시아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지리적으로 두 거대 경제권의 중심에 위치한 ASEAN은 이들의 성장을 발판 삼아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구조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6. ASEAN’s Peace Prize (ASEAN 평화상)


이 책의 마지막 장은 ASEAN이 동남아시아와 세계에 제공한 수많은 혜택을 기념하고, 그 업적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ASEAN의 성과는 종종 저평가되거나 무시되고 있으며, 심지어 ASEAN 자체도 그 위대함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이 장은 ASEAN의 주요 성과를 재확인하고, 미래를 위한 세 가지 과감한 제언을 제시한다.


ASEAN의 세 가지 위대한 성과


50년간의 평화: 동남아시아는 ‘아시아의 발칸반도’라 불릴 만큼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ASEAN 창립 이후 회원국 간의 전면전은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분쟁 지역과 비교했을 때, 이는 진정 놀라운 성과이다. ASEAN의 평화는 우연이 아니다. 공동의 위협에 맞서 단결하고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해 온 꾸준한 노력의 결과다. 이러한 공로만으로도 ASEAN은 마땅히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6억 명의 삶 개선: ASEAN은 회원국 국민들의 삶을 전례 없이 개선했다. 1965년 싱가포르의 1인당 소득은 가나와 비슷했지만, 현재는 수십 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가장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 또한 1인당 소득 면에서 브라질과 나이지리아를 앞질렀다. 특히 베트남은 수십 년간의 전쟁을 딛고 ASEAN 가입(1995년)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빈곤율을 50%에서 3%로 낮추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은 ASEAN이 제공하는 안정적인 환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대국들의 문명화: ASEAN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문명화’시켰다. 냉전 시기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데 이어, 현재는 미국, 중국, 일본, 인도 등 모든 강대국들이 ASEAN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경쟁적인 구애는 ASEAN에 막대한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며, ASEAN을 동아시아 지역 협력의 ‘앵커’로 만들었다.


ASEAN의 미래를 위한 세 가지 제언


ASEAN이 앞으로 50년을 더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감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대중의 소유 의식 강화: ASEAN의 소유권을 정부에서 국민에게로 이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ASEAN의 역사와 문화를 모든 회원국 학교의 교육 과정에 포함해야 한다. ASEAN을 주제로 한 월드컵이나 올림픽 공동 개최, 문화 축제 등을 통해 국민적 관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 이는 ASEAN이 정부의 변덕스러운 정책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보험이 될 것이다.


역동적인 사무국 구축: 현재의 미약한 사무국을 벗어나, ASEAN의 성장에 걸맞은 강력하고 역동적인 사무국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회원국이 똑같이 분담하는 현재의 재정 원칙을 버리고, 유엔에서 사용하는 ‘지불 능력(capacity to pay)’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 싱가포르와 같은 부유한 나라들이 더 많은 기여를 한다면, 사무국의 예산과 역량은 크게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새로운 등불 역할: ASEAN은 '문명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비관적인 서구의 시각에 맞서 '문명 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례는 전 세계에 중요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성공적인 이슬람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사례는 이슬람 세계의 현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ASEAN은 이러한 고유한 경험을 통해 인류의 화합에 기여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종합 시사점


키쇼어 마부바니와 제프리 승의 『아세안의 기적: 평화를 위한 촉매제』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지정학, 경제적 발전,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통섭적으로 분석하며, ASEAN이 인류에게 주는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종합적인 메시지는 ASEAN이 '불완전한 기적'을 통해 현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세기의 도래와 동남아시아의 역할


아시아 세기는 중국과 인도가 경제적으로 부상하는 것을 넘어 동남아시아가 지정학적, 문화적 '앵커'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도, 중국, 이슬람, 서구 문명의 파도를 모두 경험하고 수용한 동남아시아는 그 어떤 지역보다 문화적 다양성이 풍부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관용과 실용주의의 문화는 ASEAN이 강대국들의 경쟁을 조율하고, 역내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대국 경쟁 시대의 생존 전략: 균형과 중립


ASEAN의 가장 큰 지정학적 기여는 미국, 중국, 일본, 인도 등 강대국들이 상호작용하는 중립적인 외교 플랫폼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ASEAN은 강대국들에게 '분열된 ASEAN'보다 '단결된 ASEAN'이 장기적인 자국 이익에 더 부합한다는 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강대국의 경쟁을 위협이 아니라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적 혜택을 얻는 기회로 전환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ASEAN의 이러한 생존 전략은 미-중 경쟁 심화라는 지정학적 압력을 받고 있는 모든 중소 국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지역 통합의 새로운 모델: 유연성과 실용주의


ASEAN은 유럽연합(EU)의 성공적인 지역 통합 모델을 참고하면서도, EU의 경직성을 답습하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모든 회원국이 동시에 모든 것에 동의해야 하는 EU와 달리, ASEAN은 'ASEAN-X 원칙'과 같이 준비된 국가들이 먼저 협력을 추진하는 유연한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EU가 24개의 공식 언어를 유지하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것과 달리, ASEAN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지역 통합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평화를 위한 필수 요소: 공동체 의식과 시민의 참여


ASEAN의 성공은 정부 간의 협력에 그치지 않고, 수천 건의 회의와 비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형성된 리더십 엘리트들의 공동체 의식과 신뢰 덕분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ASEAN의 가장 큰 약점으로 대중의 소유 의식 부족을 지적하며, ASEAN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정부 주도의 협력을 넘어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들은 모든 ASEAN 국가의 학교 교육 과정에 ASEAN 관련 내용을 포함시키고, ASEAN 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행사를 통해 대중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국에 대한 통찰: 동북아 평화의 길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환경을 성찰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동북아 3국(한·중·일)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문제와 강대국 경쟁으로 인해 협력 관계가 매우 취약하다. 이는 ASEAN이 다양한 문화와 이질적인 정체성을 극복하고 평화 공동체를 구축한 사례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국은 ASEAN의 경험을 통해 동북아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ASEAN이 강대국 경쟁을 조율하며 얻은 '지혜'는 미-중 경쟁의 한가운데 있는 한국에 필수적인 외교적 역량이다.


『아세안의 기적』은 동남아시아의 성공을 사례 연구로 제시할 뿐 아니라 분열과 갈등이 가득한 현대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로드맵 역할을 수행한다. ASEAN의 성공은 불완전하더라도 충분히 위대하며, 인류에게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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