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9월호 추석>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9월호 주제는 '추석'입니다. 아래 글은 오글오글 멤버 한라봉님 글입니다.
추석은 단 하루였으나 밥상은 며칠째 추석이었다. 오늘 아침도 제사상에 올랐던 나물과 전들이 그대로 올라와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바뀐 것이 있다. 지겹게 올라오던 탕국이 미역국으로 바뀌었다.
“엄마, 그래도 생일인데 미역국뿐이야?”
어차피 기대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내년 생일은 좀 달라질까 싶어 한마디 슬쩍 던져본다.
“아니 그럼 있는 음식들은 어쩌고? 그리고 언젠 맛있다고 잘 먹었잖아!!”
돌아오는 것은 타박이었다.
3일 전 추석 당일 아침.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약과의 비닐 포장을 뜯어 제기에 차곡차곡 쌓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차례가 끝나고 상을 치울 때 요 녀석부터 한 입 먹어야겠다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기를 바랐다.
오전 10시 무렵 제일 큰집에서 차례를 끝낸 남자 어른들이 우리 집에 들어섰다. 우리 집은 그다음 큰집이었다. 부엌이 분주해진다. 제사상이 펼쳐지고 제기에 음식이 담겨 손에서 손을 거쳐 자리를 찾아간다.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어류는 동쪽 육류는 서쪽, 서쪽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으로 등등. 누가 정해놓은 건지 모를 법에 맞춰 커다란 상 가득 음식이 채워졌다.
그 상 앞에 서열대로 나란히 서서 두 번의 절을 한다. 며느리는 제외다. 음식을 했으니 굳이 절까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은 참 별로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하는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단 며느리는 이 집 식구에서 제외라는 느낌이 더 컸다. 그 누구도 그 부분에 대해 말 한마디 없었다. 남자 어른들의 권위의식과 묵묵히 그에 따르는 여자 어른들. 어린 내게는 침묵 속의 폭력과 같은 장면과 분위기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산소 앞에서 '저는 교회 다니고 있어서 절 안 할래요'라고 반항했다가 어른들께 엄청나게 혼이 났었다.
차례가 끝난 후 식사 시간은 더 노골적이다. 며느리 자리는 없다. 며느리들은 음식을 담고 내어주기 바쁘다. 남자 어른들이 하나둘씩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면 그제서야 며느리들도 빈 자리를 찾아 뒤늦은 식사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친척 집에 가게 되면 더 심했다. 남자와 여자는 겸상조차 하지 않았다.
명절은 화가 나는 일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약과는 달콤했다. 차례를 끝낸 후 상을 치우며 한 개를 먹고 남은 약과부터 챙겨서 냉장고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다람쥐가 저장해둔 도토리 꺼내 먹듯 생각날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어 하나씩 야금야금 꺼내어 먹었다. 명절날 좋은 건 이 약과 하나였다.
추석 3일 뒤, 약과의 달콤함이 끝날 때쯤이면 내 생일이 돌아왔다.
부모님이 음력 생일을 챙겨주셨기 때문에 해마다 추석 3일 후가 내 생일날이었다. 그게 참 싫었다. 생일상은 미역국을 제외하면 제사상에 오른 음식 그대로였다. 생일상인지 제사상인지 모르겠는 서러움이 있었다.
"음력으로 생일이 1월 2일 아니가? 왜 1월 27일로 출생 신고를 했노?"
그런 서러움이 있던 내가 참 공교롭게도, 첫째 아이를 설날 다음 날에 낳고 둘째 아이를 추석 하루 전에 낳았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아이들의 출생 신고를 양력 생일로 해버렸다. 왜 음력 날짜로 하지 않느냐는 애들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냥 넘겨버렸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명절 연휴와 겹쳐 보내게 할 수는 없다. 내 생일이 그러했으니까. 거창한 걸 바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생일상에 제사 음식이 오르지 않길, 바라는 건 단지 그거 하나였다.
아이들 생일을 양력 날짜로 챙기기로 하고 아이들 생일이 돌아오면 나는 일주일 전부터 메뉴를 구상하고 장을 봐서 상다리가 휘어질 잔칫상을 차렸다. 내가 그토록 받고 싶던 생일상을 차렸다. 정작 내 생일은 밖에서 미역국을 사먹으면서 말이다. 나도 누가 차려주는 잔칫상을 받고 싶다.
- 미역국, 3색 나물, 불고기, 잡채, 꼬지전...
올해 생일엔 내가 나에게 잔칫상을 차려주자 싶어 아이들 생일을 준비하던 것처럼 메뉴부터 구상해 본다. 청개구리 심보인가? 이혼 후 시댁은 사라졌고 친정에서 지내던 제사는 작은아버지 댁으로 옮겨가서 제삿밥을 먹어본 지 오래되었다. 이제 오히려 명절이 되면 제삿밥이 그립다. 그래서 메뉴에 나물도 넣고 꼬지전도 넣었다. 하지만 이내 메뉴를 적던 종이를 집어던졌다.
귀찮다. 음식 할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역시 남이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
직접 음식 하지 말고 나에게 맛있는 걸 사주자.
일단 약과부터 목록에 추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