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혹은 퇴직의 사유 (4)
“저의 로망이 다 이뤄지고 있어요.”
"물결님 로망이 뭐였는데요?"
"이런 멋진 풍경을 여유 있게 보는 거요."
출판편집학교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로변에 줄지어선 은행나무가 장관이었다. 풍성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흔들리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진부한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물결님은 3교대 간호사로 일하다 편집자의 꿈을 안고 퇴사한 분이다. 첫 만남에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이름을 단번에 외운 그녀, 처음으로 함께 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7명의 대화를 귀담아듣고 주문 메뉴를 순식간에 외워버린 그녀. 그녀는 한 번 본 사람의 인상과 이름, 증상을 즉시 외워야 하는 간호사였다.
"저도 로망이 실현되는 중! 학교 밖에서 점심 먹는 거 로망이었어요."
내 얘기냐고? 아니다. 무엇이든 먹고 싶은 메뉴를 얘기하면 척척 맛집으로 안내하는 동글님 이야기다. 동글님은 S대 교직원이었다. 출판편집학교가 S대 앞에 있어서, 맛집을 꿰고 있는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고 경의선 숲길을 산책할 때면, 전 동료들과 마주치는 웃픈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때마다 동글님은 '좋게 퇴사해서 다행'이라며 귀엽게 웃었다. (심지어 지난달에 퇴사한 따끈따끈(?)한 퇴직자^^)
"다들 안정적인 직장 왜 그만두냐고 그래요."
아직은 서로를 알아 가는 단계다 보니 '전 직장, 출판편집학교에 온 이유' 같은 것이 자주 대화 주제가 된다. 그럴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왜 여기에 와 있나. 심지어 강사님 조차 월급도 근무환경도 좋지 않은데 왜 출판계에 발들일 생각을 하냐고 물을 정도니. 그럴 때마다 이들은 이야기한다.
"편집자, 낭만 있잖아요."
맞다. 낭만 있다. 글 쓰는 일. 책 만드는 일. 온종일 단어, 문장과 씨름하는 일.
그런데 낭만이 밥 먹여주나?
오늘 교사모임 회지에 제출한 원고의 원고료가 들어왔다. 원고료라고 부르기도 귀여운 돈이지만 글로 몇끼니를 해결한다는 건 기쁜 일이다. 오후에는 자습서 선인세가 들어왔다. 정산받을 인세를 미리 당겨 받는 거지만 이것도 참 기분이 좋다.
매년 5월에는 교과서, 자습서, 문제집, 단행본 등의 인세가 한꺼번에 정산된다. 큰돈은 아니지만 1년에 3번 정도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밑천이다. 월급을 따박따박 받을 땐 여행 경비로 썼지만, 수입이 끊길 내년부턴 매달 2인 가족 식비에 보탬이 될 참으로 고마운 돈이다.
글로 먹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 종일 글을 읽고, 글을 다듬는 삶. 참 낭만적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조금이나마 글로 돈을 벌고 있고, 앞으로는 글 만지는 것이 전업이 되어 먹고 살테니. 그리고 글 좋아하는 사람이 주변에 수두룩하니.
큰 돈을 벌지 못하면 어떠하랴. 계절이 바뀌는 걸 알아채며, 마음의 결이 같은 사람들과 점심 한 끼 먹으면 그만인 걸. 이게 인생의 낭만 아니겠는가.
짬뽕 집에서 짬짜면 먹으며
가을 풍경에 감탄하는 사람
겨울 냄새가 솔솔 날 땐
잉어빵을 먹어줘야 한다는 사람
이런 것이 낭만이라면
나는 계속 낭만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낭만에는 큰 돈이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