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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Sep 09. 2015

캐나다 이민생활 <12>

좌충우돌 초기 정착기(B)

(사진 설명) BC주 초대 총독인 더글라스경. 영국그늘에 있었던 시절. 뒤쪽에 보이는 시설은 초창기 주청사. 목책은 인디언 공격을 막기 위해  설치됐다. 노동절 휴일날 뒹굴 이하다가 잠깐 한컷.


어렵게 얻은 직장(사실 지나고 나니 별 어렵지 않았다)이라 생각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최선을 다 했다. 출근시간은 45분 정도 소요됐다. 새벽 출근임에도 와이프는 항상 따뜻한 아침상을 대령했다.  실제 식당일 이라서 출근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와이프는 자신의 밥을 고집했다.  이것도 초기에 부딪힐수있는 난관을 헤집는데 약간의 도움을 준 것 같기도 하다. 


출근하면 바로 주방에서  준비해둔 음식을 각 지점 격인 다른 식당에 배달하는 게 첫 과업이었다. 이게 끝나면 물건 사러 다녔다. 다운타운에 있는 식당은 워낙 장사가 잘돼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갔다.  다운타운은 복잡하고 일방통행이 많아 처음엔 상당히 헷갈렸다. 교통 싸인을 보는데 우리랑 좀 다르고 낯설어서 잠간 대기하고 있다가 다른 차의 움직임을 보고 진행한 적도 있다. 이럴 땐 인도 택시기사들은 어김없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뭐라고 씨부린다. 다행히 뭇알아 들어서 스트레스는 덜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 갈길이 바빠서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가 없었다.


각 식당엔 불법체류자들이나 노동허가가 없는 사람들이 주방 깊숙이 찡박혀서 그릇도 씻고 주방보조일등을 맡았다. 주로 중국인들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돈벌이는 쉽지 않은 상황. 일부는 한 푼 두 푼 모아서 학교도 다니고 졸업한 뒤 취직도 하는 케이스가 있긴 한데 대부분  일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서 불평불만으로 하루해를 넘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과 간혹 마찰이 일곤 했다. 손님을 예측한 뒤 물건을 오더 하면 두 번 배달을  한 번만 하면 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무시로 호출한다. 고춧가루 없다고 했다가 참기름 떨어졌다고 시키는 식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자주 바뀌는 것도 힘든 이유 중에 하나였다. 좀 정들고 성향을 파악하고 말귀가 트일라 하면 사라지고 없다. 자기들 커뮤니티로 갔는지...


처음 일주일간은 내가 차를 몰고 다녔다. 애들은 방학기간이라 큰 불편은 없었는데 식구들은 차가 없어서 하루 종일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날 기다렸다. 그래서 버스 통근을 시작했다. 3번갈아타고 1킬로 정도 걸으면 될 것 같았다. 소요시간이 길어 첫 구간은 와이프가 태워주는 걸로 했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다행히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왔다.  이것도 학습이라고 생각하니 할만했다. 여기 버스 노선은 촘촘하게 박지를 못한다. 땅은 넓고 인구가 적기 때문이다. 몇 번 갈아타거나 걷는 게 상수다. 


퇴근 무렵에는 전식구가 날 데리려 왔다. 이게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전식구가 매달리는 게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와이프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문제는 나의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못한 점이다. 원래는 오후 5시쯤이면 일이 끝나는데 바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몰라라 하고 떠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어떤 때는 전식구가 식당 주차장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식당 밖에서 하는 허드레 내일들을 살짝살짝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이런 사정은 있었지만 대안을 생각할 처지가 못 됐기 때문에 천직이라 생각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이런 일이 길어지면서 애들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휴일도 없이 식구 곁을 떠나는 것과 전식구가 아버지일에 매달리는 게 첫 번째 불평이었다. 휴일이면 가족끼리 뭔가를 도모해가면서 이사회를 같이 배우고 알아가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박탈된 것이었다. 그 당시 주 이민자인 나를 제외하고는 영어를 잘못했다. 콜라 한병도 못 사는 그런 처지였다. 애들은 어렸고, 한국에서도 아예 영어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와이프는 하면 할 수 있었을 건데 입을 다물고 우리 말만 고집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시장을 가도 다 같이 움직였다. 누군가 봤으면 참 다정한 가족이다고 했을 것이다. 속도 모르면서...

이런 일이 누적되면서 결국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좀 나은 일자리, 내일을 내다볼 수 있는 일을 찾아 보기로 했다.


밑천이 짧은 나에게 더 나은 게 존재 할리가 만무하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가족과 함께 뭔가 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한인 교차로를 샅샅이 뒤졌다. 교차로는 일주일에 두 번 발행되는데 한인 사회의 크고 작은 일자리부터 사고팔고 등 온갖 게 다 등장했다. 이걸 자세히 보면 한인 커뮤니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어떤 비즈니스가 유행을 타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궁하면 통한다고 미래를 향해 보이는 소박한 일자리가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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