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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8일 - 도깨비불

by 휴먼

팽팽히 당겨지던 줄이

탁 끊어지는 감각.

끊어진 감각의 자리엔

無만이 존재했다.


어제는 지하철 탄 내내

아무런 표정 없이,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이 나오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닦기도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끊어졌던 감정은 쨍한 햇살 속에 잠깐 이어졌다가

옛 친구와의 추억팔이에 완전히 다시 연결됐다가도

포항에 오자마자 바로 다시 끊어졌다.

오늘은 내내 끊어진 채로 다녔다.


더는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안광이 사라진 눈에 힘까지 풀리니 꽤나 피곤해 보인다.

굳어진 안면근육.

풀 수 있는 한 최대로 힘을 푸니

평소엔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내 안면비대칭이 느껴졌다.

그동안은 표정 지을 일이 많아 몰랐는데

힘을 푸니 입이 한쪽으로 쏠리더라. 신기했다.


오늘은 사수들과 함께 코웍하는 랩실 박사님과 미팅을 했다.

미팅하는 내내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중간중간에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말을 꺼냈다.

아직 의견을 내놓을 힘이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내 의견은 씹힐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어차피 묻힐 의견이지만 그냥 말했다.

입은 뚫려있으니 그냥 뱉기로 했다.


역시나 가뿐히 씹히고 끝났다.

미팅이 끝나고 오피스로 돌아가는 길.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수들보다

나는 세발자국만치 뒤에서 걸었다.

발걸음은 또 얼마나 빠른지

분명 걷기만 했는데도 숨이 차는게 이상했다


그러다,

가쁜 숨 사이로 보이는

사수들의 뒷모습이

문득 도깨비불 같아보였다.


그래서 주문을 외우기로 했다.


너희들은 도깨비불이다.

도깨비불은 눈도 없고 손발도 없어.

입도 표정도 뭣도 없으니

나한테 상처줄게 전혀 없다.


도깨비불 도깨비불.

불씨는 아마 열등감 혹은 두려움이겠지.

나를 무시하고 짓밟을 때마다

기쁘다는 듯 좀 더 화르륵 타오르곤 했겠지.


도깨비불 도깨비불.

나의 존재를 새까맣게 태워온,

위협적이지만 별거 아닌

도깨비불 도깨비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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