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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3일-감정이 없었으면 좋겠어.

by 휴먼

바쁜 일상을 보낸다.

기기 견적 받으랴 끊임없이 메일을 보내고

기기 예약건으로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포스텍 입시도 동시에 준비한다.


큰 일 하나 맡는 것과 작은 일 여럿 맡는 것은 다르다.

일단 난 전자가 훨씬 좋다.

아마 모두가 그럴 거다.

작은 일을 여러 개 맡는 것은

다른 일을 까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찝찝함과

A에서 B로 태세전환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

그리고 짜증 나기 그지없는 잡무들을 애매한 시간간격으로 해치우며

다른 잡무가 다가오기 전까지 공부도, 실험도 뭣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집중력 분산을 경험해야 하니까.

신경이 곤두선다. 마음을 그대로 표출한다면 오피스 벽에다 손톱을 갈다 못해 피가 나올거다.


잡무를 해치우면서 그나마 잡무라도 잘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끔찍하다.

나날이 갉아먹히는 자존감에

차라리 감정이 없는 인형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착한 척 성실한 척은 다 하지만 은근히 뒷담을 즐겨해 가십을 만들어내는 사수가 역겹다.

그런 사수라도 나보다 훨씬 똑똑한지라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걸 견뎌야 한다는게 역겹다.

정말 싫어하는 인간한테 정말 싫어하는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끔찍하다.

감정이 없어진다면 정말 정말 좋을 텐데. 정말 좋을 텐데.


운동을 하는 시간이 좋아졌다.

운동하는 도중엔 정말 괴롭고 힘든데

그 덕분에 아무 생각이 안 든다. 그게 참 좋다.

내가 낮에 어떤 시선을 받았건, 어떤 상처를 받았건,

"일찍 퇴근하는 애들은 일찍 퇴근하는 이유가 있어."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지라도

그렇게 일찍 퇴근해서 운동을 하면 그 순간만큼은 괴로워서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운동할 때의 괴로움이 일상의 괴로움보다 훨씬 낫구나.


가끔은 운동할 때의 괴로움이 일상의 괴로움을 차마 다 덮지 못해

아프고 힘든 와중에 1시간 전에 막 받은 상처가 괴로움을 뚫고 올라와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괜찮다. 난 괜찮아.

참을 수 있다 생각하며 눈에 다시 힘을 준다.

참을 수 없으니까 눈물이 올라올 뻔 한거지만서도

괜찮다고 말하지라도 않으면 진짜 안 괜찮아질 것 같아서

괜찮다.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왜 그럴까.

이 생각은 안 하기로 한다.

왜 그럴까라는 질문은 연구할 때만 하자.

저들을 이해하려 들지 말자.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찢어발겨진 나의 자존감이나 보자.

말 한마디 건네는 게 무서워서

직접 대화는커녕 카톡으로 겨우 적어 내린 몇 글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쳐서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

말을 걸러 가기 직전 자꾸만 커지는 심장 소리.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된 나.

그야말로 패배자의 모습이다.


주장을 피력할 에너지가 없다.

그냥 어차피 짓밟을 거면

괜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짓밟고 가줬으면.


내 마음이 밟히고 밟혀 해질 정도가 된다면.

그렇게 종잇조각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면.

그럼 좋을 텐데.


내게 감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상처 후 반드시 곪아 터지는 면역반응을 겪어야 한다면

그냥 면역 자체가 없으면 더 좋을 텐데.


면역력이 있어봤자

어차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라면

면역력이 있든 없든

결국 죽는 건 똑같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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