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술을 참 많이 마셨다.
뭐, 힘들어서 마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나와 함께 인턴을 하는 친구가 굉장한 인싸라
같이 어울려 다니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시게 됐다.
술은 참 좋다.
피곤에 범벅된 기분마저 멱살 잡고 끌어올리고.
붕 뜨는 기분. 그리고 술에 취했을 때만 볼 수 있는 누군가의 감춰진 모습들이 재밌다.
어제는 또 친한 박사님과 술을 마셨다.
그냥 가볍게 마시고 헤어질 줄 알았더니만
금요일 밤이니까. 기분이 좋으셨는지 2차를 가자고 하셨다.
나는 또 알겠다며 따라나섰다.
여기까지는 늘 있던 일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박사님의 모습을 보게 될 때까지 말이다.
웬일로 거하게 취하셨더라.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항상 이성적이고 절제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취하다니 좀 낯설었다.
하지만 반갑기도 했다.
그래도 이젠 내 앞에서 만취한 모습까지 보여주는구나.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 때론 기계 같아 보이기까지 했던 그 사람이
그렇게 다양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포커페이스를 잘해서 주름이 안 생기겠다는 얘기를 함께 나눴던 것이 꼭 거짓말 같았다.
꽤나 생기 있고 감정적인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풀려있는 모습이 썩 귀여워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도 같이 불러서 놀자는 박사님의 말에
‘이 사람 오늘 진짜 평소답지 않네.’
그렇게 생각하며 동기를 불렀다.
술자리를 워낙 좋아하는 친구라 흔쾌히 합류해 주었다.
분위기는 더 무르익어 갔다.
동기가 또 본인의 최대 관심사인 연애 얘기를 꺼냈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취한 박사님을 처음 봐서 적응을 못하는 듯했는데,
바로 재밌어졌는지 도파민을 장착한 질문을 한다.
‘지금은 취했으니까 말해주지 않을까’
의도가 노골적인 질문에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사람이 무방비할 때를 노려서는 안 되는 건데.
폭주 중인 박사님이 걱정이 되어 괜히 괜찮냐며 읽지도 않으실 카톡을 보냈다.
정작 박사님은 아무리 취해도 자기는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한다며 자신만만해하셨지만 말이다.
연애에 대한 그녀들의 가치관은 도발적이었다.
아니, 좋게 말해서 도발적이지.
그냥 바람을 펴도 괜찮다. 양다리를 걸쳐도 괜찮다.
흔히 연예인 또는 정치인들이 한다면 수많은 조롱과 비판을 받을 가치관이었다.
애초에 사람을 만날 때 진심을 주지 않는 듯했다.
결혼할 사람과 연애만 할 사람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런 게 안 되는데.
안 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믿는데.
세상에는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많나 보다.
똑똑하고 매정한 사람들.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나 홀로 피부가 차가워져 가는 걸 느꼈다.
진심이 없는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은 너와 내가 마음으로 맞닿는 것이라 믿었는데
이들에게는 사랑이 있을까.
이들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알긴 하는 걸까.
취기에 휩싸인 채 공짜가 가장 비싼 거라고 작게 읊조리던 박사님을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데이고 데여
이제는 남에게 기대하지 않고
남이 주는 호의가 사실은 가장 비싼 거라고.
누구나 호의를 주면 갚아주길 바란다고 말하던 그 사람이 아프게 느껴진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실까.
졸업 후 오랜만에 연락한 나의 카톡에
‘얘가 나한테 바라는 게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진 않을까.
아껴주고 싶고, 안타까워지는 마음이
그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다가올까.
진심 없이 사랑을 하는 그 사람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언젠가는 나의 카톡을 마냥 반가워해주셨으면.
진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나는 이미 좋아하게 되었으니.
나는 나의 방식대로, 조금씩 진심을 꺼내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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