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국으로 중도 귀국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갈까 말까를 계속 고민하는 꿈. 꿈에서 깬 이후에도 고민하던 감정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지만, 아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어이없어하며 이불을 털고 일어났다.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 평범한 날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 속에 쌓아둔 나의 인내심이 오늘 폭탄처럼 터지고야 말았다. 추우면 춥다고 내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만지고, 옆구리를 찔러대며, 자연스럽게 어깨와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엔 여기서 자고 가자 농담을 서슴지 않게 하는 이들에게. 나는 오늘 ‘더 이상 내 몸을 만지지 마.’라고 소리 지르고 말았다.
이들의 희롱은 ‘내가 한 말 농담인 거 알지?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 너 매우 좋아해.’ 등으로 항상 끝난다. 충분히 화낼만한 일이고, 충분히 예민할 만한 일이지만 이곳은 자주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만 덜 예민하면 모두와 둥글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 그리고 착각 속에 사는 것이 훨씬 편해 보이게 만든다. ‘성희롱’이 아닌 그저 ‘농담, 괴롭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처럼 이건 그저 성희롱이 아닌 농담이고, 작은 괴롭힘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다. 덕분에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느린 시간 덕에 나란히 볕을 쬐며 한껏 여유를 부리지만, 견고히 남아있는 인디헤나의 문화는 남성 중심 문화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견고해 보이는 이들의 문화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메스티조들은 가끔 나에게 ‘인디헤나가 좋아? 메스티조가 좋아?’라고 질문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모두 가지는 이들은 이름으로 서로를 차별한다. 인디헤나의 성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한다. 그러한 이들이 나에게 한 질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대답하지 않자, 인디헤나를 밖에서 불러들여 머리카락을 붙잡고 ‘이렇게 머리 긴 남자가 좋아? 아니면 나처럼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좋아?’라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되물었다.
인디헤나였다면 나에게 그러한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인디헤나의 문화가 계속해서 유지되었으면 좋겠고,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부족어; 키츄아어를 계속해서 배울 계획이다. 하지만 키츄아어를 구사할 때마다 허리춤과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는 그들에게 느끼는 박탈감은 마치 어느 농성장에서 농성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 ‘어여쁜 여성분이 왔는데, 술은 여자가 따라야지. 건배사는 여자가 해야지’를 들었을 때의 박탈감과 일치한다.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또 다른 차별과 희롱 앞에서 무덤덤하다는 것은 비참하리만큼 슬프다.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수없이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와 너무 많은 감정이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매일같이 언급되는 가해자들의 이름. ‘안태근, 이윤택, 조민기, 조재현, 오달수 그리고 등등.’ 늘 피해자만 고통받는 현실과 이곳 또한 변하지 않는 여전함에 나의 인내심은 더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계속해서 연락하는 거지 같은 소방관에게 ‘너 내 번호 어떻게 알아? 더 이상 연락하지 마.’라고 대답했고, 길거리에서 온갖 희롱과 추파를 던지는 남성들에게도 ‘너 나 알아? 이거 성희롱이야!’라고 욕을 해댔다. 그리곤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그들이 내 집을 봤을까 봐. 그들이 혹시나 내 집으로 따라 들어올까 봐. 오늘의 꿈은 나의 무의식이었나 보다. 한국으로 돌아간들 지금의 삶보다 나을 거라는 확신이 없고, 이곳에 계속 살기엔 나와 불편함을 공감하며 살아갈 이들이 아직, 없다.
이곳에서.
이러한 곳에서.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도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