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feat.박치기 공룡)

바니랑 보내는 퇴사 후의 일상

by sona



퇴사를 했다. 그게 2월 말 즈음이었으니 회사를 나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셈이다.

작년 봄에 입사했는데 어느덧 계절이 훌쩍 지나 다시 봄이다. 2월 말에는 추워서 롱패딩을 입었는데, 요즘 날씨는 겉옷을 입고 나갈지 말지 고민하게 될 정도로 따뜻해졌다.


퇴사를 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바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 좀 더 신경 써줄 수 있게 됐다는 것.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렇게 큰 신경을 써주지는 못하고, 그냥 하루 종일 같이 붙어있기만 한다.



무아지경으로 자는 바니 / 평소에 무릎에 누운 모습

나의 하루 일과는 대충 이렇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는 소화를 시켜야 하니 소파에 앉는다. 그럼 어디선가 바니가 후다닥 나타나 내 무릎에 눕는다. 그렇게 바니랑 같이 햇볕을 맞는다.

가끔 햇살이 강렬한 날이 있는데, 그럴 때는 아예 창문 바로 아래서 바니랑 같이 일광욕을 하곤 한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면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는데, 그렇게 있으면 햇빛 아래 널어둔, 바람에 흔들리는 이불이 되는 느낌이라 좋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이전 집만큼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고층이라 나무도, 새도 이전만큼 자주 볼 수 없다.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짧다. 이전 집은 해가 정말 잘 들어서 바니가 오래오래 일광욕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바니가 무척 행복해 보였는데.


대신, 이곳은 달이 잘 보인다. 밤이 되면 달이 아주 환하고 크게 떠서, 가끔 바니를 안아 들고 창밖을 보곤 한다. 정확히는 지나가는 바니를 잡아다가 저 달 좀 봐, 짱 크지, 하고 강요하는 거지만. 갑자기 언니 품에 갇히게 된 바니가 어리둥절하게 보는 게 달인지 내 얼굴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나쁜 점이 있다면 좋은 점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사실 나는 좋은 점만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쁜 것만 기억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게 나을 테니까. 기억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지나간 시간이 새카만 기억을 표백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본 기억은 이도저도 아니라 애매하고, 엉성하게 흐릿하다. 표백보다는 연한 흰색 물감을 겹겹이 칠해둔 것 같다. 그래서 흰 물감 아래에 기존의 탁한 것들이 희미하게 비치는 것 같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나쁜 기억을 하얗게 덮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림도 없구나. 그런 거라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굳이 좋았다고 포장할 필요도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적고 있었는데, …


너무 동그란 머리통


바니가 난데없이 내 손에 박치기를 해 핸드폰을 떨궜다. 얼른 쓰다듬으라는 뜻이다. 비어버린 손으로 바니를 하염없이 쓰다듬어주다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까먹어버렸다. 정말이지 웃긴 박치기공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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