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바치는 글.
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때때로 창문을 열면 아, 여름이었지, 하며 깨닫곤 했다. 나는 홀로 추위 속에 앉아있었다. 창밖의 햇빛은 나를 위한 영화 같았다. 그저 보기 좋을 뿐인 그런 영화. 재미있진 않아도 인상 깊은 느낌의 영화. 분명 나는 모두와 함께 계절을 보내는 것이 틀림없음에도 그들과는 퍽 다른 계절을 보내곤 했다.
우뚝 서 있는 에어콘은 끊임없이 바람을 내뱉었다. 가끔 나는 환경이 나빠질 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추는 일은 없었다. 내가 환경을 생각하며 살기 위해서는 일 년 내내 겨울인 나라로 가야할 터였다.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때로는 인공적인 추위 속에 앉아 자연의 거대한 빛을 바라보곤 했다. 내가 없는 여름의 모습은 화려해보였지만 탐이 나지는 않았다. 꼭 내가 가지고 있기 부담스러운 보석들과 같아보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끔, 에어콘을 최대한 세게 튼 뒤 이불을 덮은 채로 빛들을 바라보았다. 어김없이 전력을 낭비해대는 내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도 사람인지라, 언젠가 집 안이 미친 듯이 답답해지면, 사람 하나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새벽에 몰래 나와 보곤 했다. 나의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이고 적은 반경을 홀로 산책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다. 나와선 하염없이 달을 본 뒤, 편의점에 들러 큰 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사곤 했다. 집에 들어오면 아이스크림을 냉동고에 넣어놓고 내일을 기다리며 잠에 들었다. 그런 날은 며칠 되지 않지만, 그것조차 나에겐 꽤 큰 용기였다.
겨울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고 평화로웠다. 지루하다는 건 나쁜 게 아니었다. 지루하지 않은 것이 꼭 좋은 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혼자 요리를 하거나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며 일상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놀러온 X가 말했다.
- 이게 사는 거니.
그 말에 나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화제를 돌렸다. 바로 응, 이라고 대답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여름에 죽어있는 지도 몰랐다. 모든 기력을 뺏긴 채로. 혹여 전생의 나는 여름에 아주 큰 죄를 받은 건 아닐까. 그래서 여름을 그토록 피하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집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나에겐 축복이었다.
X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 말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걱정이 묻어있는 말이었다. 가을이 되면 함께 멀리로 놀러가자, 하고 나와의 미래를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X가 좋았다. 그 날 그녀는 나에게 갖가지 먹을 것들부터 예쁜 무늬의 양산, 다가올 가을에 입을 만한 옷 몇 벌을 선물해주고 떠났다.
사실 많은 사람들과는 여름이 다가오기도 전부터 꽤 소원해지기 시작했었다. 무기력한 태도로 누워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어떠한 연락도 소중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걸러진 내 인간관계는 당연히 소중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참 다행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빛나는 해와 반짝이는 유리창, 이글대는 아스팔트, 그것이 내 여름의 전부였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갖가지 여행 풍경이나 여름의 스포츠 같은 것들은 환상일 뿐이었다. 나는 대체로 환상을 싫어했다. 누군가는 환상을 꿈꾸곤 한다지만, 나는 떠오르는 환상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이 왜 나에게 환상인지, 실제로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같은. 그런 생각은 유독 여름에 심해지곤 했다. 몇 시간만 밖에 있어도 벌겋게 달아오를 피부, 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과 등 같은 것들은 겪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환상 속 여름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겨울엔 즐겁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아쉽지만 겨울이 되어도 마냥 즐거워 할 수는 없다. 겨울 뒤엔 봄이고, 그 다음은 여름이기 때문이었다. 겨울은 물론 매우 즐거운 계절이고 나 역시 충분히 만끽하곤 하지만 1년은 짧았다. 그리고 그 중 겨울은 겨울의 낮처럼 짧게만 느껴졌다. 하얗게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나는 걱정을 시작하곤 했다.
- 곧 겨울이 끝날지도 몰라!
때문에 최고로 안정적인 계절은 가을이다. 막 여름이 지나갔기 때문에 다시 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시 긴 팔을 꺼낼 수 있고, 다시 외투를 장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지만,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계절은 가을이었다. 가을 초반의 깊은 태양도 용서할 수 있었다.
어느 샌가 해가 빨리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나는 하루 종일 옷 정리를 한다. 작년에 넣어두었던 가을 옷부터 그 뒤 올 겨울 옷까지 미리 꺼내놓는 것이다. 이 시기의 옷 정리는 1년 중 한 번 있는 의식과도 같은 느낌으로, 여름의 조금 남은 기운마저 빼앗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런 식으로 무기력하게 여름을 나고 가을이 왔다는 신호가 보이면 벌떡 일어나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맡았다.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처럼. 콧속에 가득 찰 때 까지 깊게 호흡하고 길게 내뱉으며 지나간 여름을 추억했다.
아, 지나간 계절아. 당신이 계절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당신이 한 철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당신이 계절이어서, 다른 계절이 있어서, 당분간은 당신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남은 날들에 부디 오지 말아주오. 내 남은 날들에.
당신에게 이리도 부탁하는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