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노트? 감사노트?

굳이 매일 무엇을 고마워해야 할까?

by 박석현

2018년 12월부터 넉 달 정도 ‘고맙노트’를 매일 쓴 적이 있다. ‘감사노트’는 많이 들어봤는데, ‘고맙노트’는 또 뭔가 싶겠다. 언젠가 '감사합니다'는 일본식 한자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국립국어원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았다. '감사(感謝)'가 일본식 한자라는 명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고, '감사하다'와 '고맙다'를 모두 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맙다'가 순우리말이고 지금까지 쓰여 온 역사가 깊다고 해서 애매모호한 ‘감사’보다는 순우리말인 ‘고맙다’는 말을 따서 ‘고맙노트’를 쓰게 되었다.


굳이 매일 무엇을 고마워해야 할까? 평소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고마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친한 친구가 천일(千日) 넘도록 감사노트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받은 나머지 나도 내 삶에 고마워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2018년 12월 05일부터 고맙노트를 쓰기 시작해서 백일(百日)이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sns에 써내려갔다. 처음에는 서너 줄로 쓰기 시작한 고맙노트가 어느덧 열 줄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고맙노트를 쓰는 데만 두세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고맙노트를 쓰면서 내가 쓰는 글과 내 삶이 맞닿아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다. ‘작가의 책을 읽기 이전에 작가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 지극히 동감한다. 정작 작가 본인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아무리 좋은 글을 써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것은 독자를 농락(籠絡)하는 것이고 독자에 대한 기만(欺瞞)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요즘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sns를 통해 독자와 소통을 하고, 미디어에 나와 방송을 하는 경우도 많다. 간혹 유명 작가를 보며 작가의 글과 삶이 맞닿아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는 좋은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겉으로 보이는 본인의 삶은 그러하지 못한 경우를 말이다. 물론 그 작가의 세세한 부분까지 들여다보지 못해 그럴 수도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삶과 책 사이에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그렇듯이 책을 읽다보면 간혹 작가와 책이 닮지 않은 경우를 접할 때가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나타내는 것이다. 책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에 좋은 글을 퍼다 나르고 짧은 글을 쓰는 일도 다를 바 없다. 글을 옮겨 나르거나 그것을 쓰는 본인의 삶과 닮아있지 않으면 이는 읽는 이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좋은 글을 쓰고, 옮기려면 본인 또한 그런 삶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무던히 노력을 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아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조금씩 변화하는 삶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면 좋겠다. 작가의 책과 삶이 닮아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작가의 강의를 들은 후 질문을 통해 작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sns나 작가에게 보내는 메일을 통해 작가와 만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작가를 알게 되면 그 책을 쓴 작가가 독자를 기만한 것인지 정말 본인의 삶과 닮아 있는지를 알게 되어 작가의 책을 조금 더 수월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글을 하나 소개한다.


공자가 젊을 때 길을 가다가 좀 이상해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은 계속 싱글벙글 웃고 심지어 춤까지 추며 기뻐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노인이기에 저리도 예의를 다해 인사를 하는 것인가?' 공자는 마음속으로 중국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또 다들 나를 존경하는데 나를 보고는 인사를 안 하고 언뜻 보기에 정신 빠진 저 노인에게 다들 인사를 하는 것일까 이상하게 생각했다. 공자는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한 다음 물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즐거워하시며, 또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는지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젊은 양반이 무던히도 배우고 싶어 하는구먼. 내가 생을 감사하는 이유는 첫째, 뱀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돼지나 개로도 태어날 수 있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저 감사하네. 둘째는 내가 90세가 넘었는데 건강하게 지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셋째는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즐겁게 일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해서 일하다가 쉴 때는 즐거워서 춤도 추는 것이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먼저 배려하게 된다. 기꺼이 베풀고 살 수 있으며 포용심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과 시기, 질투하는 마음은 백짓장 한 장 차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뀐다. 결혼하기 전에는 잘해줘야지 하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 결혼 전 마음을 잊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그럼 바뀐 사람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바뀐 사람을 탓하는 나를 탓해야 할까?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뀌는 것이 정상인데 안 바뀐다고 착각을 하는 순간 실망을 하게 된다. 왜 약속을 하고 안 지키느냐? 예전에는 달랐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이냐? 마음이 바뀌는 것도 외관(外觀)이 바뀌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 만물이 변하듯 사람의 외모도 마음도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변하는 것이니 변했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괴로워하지도 말자. 단지 늘 곁에 있음에 고마움을 느끼며 자족(自足)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의 사상 중 ‘무지의 지(無知─知)’라는 것이 있다. ‘나는 적어도 내가 모른다는 것은 안다‘는 뜻이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신전에서 사제에게 신탁을 청했다. 질문은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였고, 신탁은 ‘없다’ 라고 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신성모독은 사형까지 가능한 죄였으니 신의 지위가 요즘의 종교와는 사뭇 달랐다. 카이레폰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지혜롭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스의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에서 자신이 제일 현명하다고 신탁이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들보다는 그나마 덜 무지하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인터뷰를 계속 하다 보니 현명하다고 소문이 나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아는 게 별로 없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매우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소크라테스 자신은 적어도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 자신을 알라'의 시초이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무녀가 말했던 것이다. 이것을 ‘무지의 지(無知-知)’ 라고 한다. 진정한 현명함이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었다.


그 당시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보다 쉽게 접하며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아는지 깊이 있게 돌이켜본다면 그 당시의 지식인들과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 가치 있는 것 하나가 바로 ‘고마움’이 아닌지 되새겨보자.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마운 날이었는지 매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고마운 일들뿐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오늘 하루도 당신이 곁에 있어서 참 고맙다’고 말하며 하루를 마무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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