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너의 테두리만 맴돌았는데 네가 없어

youtube playlist - vino

by 채지연

어린 시절 유치원을 다녀오면 무거웠던 노란 가방을 내려놓고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종일 조잘거리며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어야 직성이 풀렸다. 나는 엄마의 테두리만 빙빙 돌았다. 엄마를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항상 종종거리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의 세상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 큰 원도 아녔다.


하루를 쉼 없이 떠들고 나면 밥상에 앉아 아빠에게 떠들곤 했다. 내가 이랬다, 친구 누군가 이랬다. 소재거리가 떨어질 틈이 없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재밌고 수많은 일이 있는지 신기했다. 길 가다 본 개미는 왜 이리 까만 건지, 유치원에서 나온 반찬의 맛이 어땠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주고 싶었다. 집안의 내 목소리를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노란 불빛이 사그라질 즘 나의 에너지가 바닥나면 나는 잠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불 꺼진 집안이 나를 반긴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불 꺼진 거실과 방안을 손수 밝혀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불도 밝히기 전에 내가 하는 일은 동영상 아무거나 틀어본다. 손에 물건이 가득 있는 날에도, 화장실이 급한 날에도 어김없이 핸드폰으로 노래든 어떤 영상이든 틀어 까만 빈공간에 소리를 채운다.


동생은 나의 수다를 보며 눈을 반짝이다. 몇 년 후 자신이 유치원에 들어가자 자신도 가방을 내려놓으면 같이 수다를 떨게 되었다. 마치 내가 부러웠다는 듯이 줄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또래보다 말이 빨랐다. 나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바쁜 날이면 동생을 붙잡고 말을 하곤 했으니깐.


나는 항상 가족의 테두리안을 빙빙 돌았다. 그 선은 가족이란 울타리였다. 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원이었다. 더이상 아무도 없는 그 테두리에 남아있는 잔 온기가 냉기로 변해 나를 찌르는 듯 하다. 그 서늘함은 날 갈기갈기 찢어 상처로 도려낸다. 추억은 차라리 없는 편이 좋다. 기억할것이 없는것이 마음에 덜 해롭다. 형체 없는 감정에만 호소하면 되니깐. 별거 아닌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얘기하는 것, 엄마의 아빠를 맴돌며 쉴 새 없이 떠들던 그때가 오늘따라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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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테두리만 빙빙 돌고 있었는데 그 선은 너의 테두리가 아니었어. 진한 매직으로 나를 현혹했는데 그건 내 눈물이 만든 원이었어. 네가 없는 너의 테두리에 남아있는 잔 온기가 너라고 착각한 오늘은 내가 너에게 가장 가까웠던 날인 걸까. 내가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건 네가 아닌 내 감정이었단는 걸 너무 늦게 안것 같아. 나는 무엇을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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