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머금은 세상
날씨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봄도 여름도 아닌 날씨가 이어졌다. 벚꽃이 폈고 벚꽃이 질 즈음 단 봄비가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색을 지니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세상이 흐려진다. 수채화로 그려진 세상 마냥 물기 머금은 세상으로 변하게 된다. 빗물에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차들도, 모두가 다 같이 이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
4월의 단 봄비, 나의 무거웠던 마음에 살살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무거웠던 몸을 일으켜 세워 도화지 한 장을 아무렇게나 뜯어 그림을 그렸다. 딱히 무엇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밑그림도 없이 붓에 물기를 잔뜩 머금게 하고 무작정 마음대로 그렸다. 붓이 지나가는 곳마다 물기가 잔뜩 서렸다. 다 그리고 나니, 도화지가 흠뻑 젖어있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서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것도 아니었고 어디에 걸어둘 만한 그림도 아니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빠꼼이 보이자 그림을 잘 말려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