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첫 손주인 나를 예뻐하셨다. 손자가 아닌 손녀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가 엄마를 구박을 하셨을 때도, “손녀가 귀엽지”라고 웃으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하나시라고 불렀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하나시는..”이라고 부르라고 어릴 적부터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 묻는 나의 질문에 “내가 하나시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지금도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나에게만 하나시라고 부르는 애칭이었다. 하나시는 다른 손자 손녀에게 무서운 호랑이였지만 나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할아버지였다. 사탕, 누룽지도 나만 몰래 불러서 먹였고 여자 상, 남자상 따로 먹을 때 나는 하나시 무릎에 앉아서 먹었다. 농사 망친다고 아무도 얼씬 못하는 감나무도 내가 따달라고 하면 덜 익은 감도 따주곤 했다. 물론 나를 골탕 먹인다고 떫은 감을 입에 넣어주곤 했지만... 어떤 날은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가 이뻐 남의 집인 줄 모르고 한 아름 따다 혼나는 나를 구하러 오기도 했다. 그런 일은 모른척하며 이모 삼촌을 보냈을 텐데, 내가 있다는 엄마의 말에 단번에 그 집에 가서 미안하다고 나를 구하러 왔다.
하나시는 날이 좋은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높은 바위에 날을 올려두곤 했다. 내가 신나서 동요를 부르고 딴 데 정신 팔려있으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곤 했다. 내가 무섭다고 울면 그때야 나타났다. 내가 울며불며 바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걸 몰래 지켜보는 즐거움에 뒷동산에 가는 것 같았다. 나도 매번 당하면서 하나시의 자전거에 탔다. 가끔 엉엉 우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하나시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골에 놀러 가면 텔레비전도 잘 안 나오고 심심해하는 나를 보면 동생들 몰래 불러내어, 하나시는 “따미야 하드 먹을래?”라고 말을 하면 조용히 경운기를 꺼내왔다. 그러면 1시간 거리를 걸려 나를 경운기 옆자리에 태워 동네 슈퍼로 향했다. 내 엉덩이가 아플까 봐 하나시는 의자에 고무줄로 칭칭감아 푹신한 내 전용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바람에 날아갈세라 하나시를 꼬옥 잡고 논밭을 가로질러 경운기를 타면 기분이 좋았다. 사계절이 다 좋았다. 봄에는 동산에서 꽃구경을 했고, 여름에는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가을에는 잠자리를 잡아다 실을 메달았다. 겨울에는 고드름을 따다가 눈사람 코를 만들었다. 하나시는 나의 어린시절 추억 그자체였다.
집에서 시골은 가까워서 어릴 적에는 자주 갔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량이 늘어가는 만큼 하나시를 볼 수 없었다. 나를 번쩍 들어 올리며 바위에 올려놓던 하나시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내가 올려다보던 하나시가 어느새 등이 굽어 내가 하나시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어느새 나도 하나시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오랜만에 만난 하나시다 하드를 사준다는 말에 괜찮다고 멋쩍게 웃으며 거절했다. 하나시도 더 이상 경운기와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기억 속에 하나시는 잊혀졌다.
그러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 하나시는 영원히 떠나갔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떠나갔다. 내가 시골에 갔을 때 하나시는 사라졌다. 당연하게 있어야할 온기가 없어졌다. 당연한게 아니었다. 다 하나시의 손길이었다.
그래도 하나시의 자전거와 고무줄로 칭칭감은 경운기, 나를 주려 모아두던 사탕통은 다 그대로였다. 하나하나 정리를 했다. 보고싶은데 볼 수 가 없다. 20살이 되어서 처음으로 새로운 감정을 배웠다. 볼 수 없는 사람의 그리움. 하나시가 너무 보고싶어 꿈에 나타나길 바랬다. 그런데 꿈에 한번을 안나타났다. 한번쯤 나타나겠지 하고 십년이 지나도록. 가족 모두의 꿈에도.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약도 먹고 병원도 가고 아프고 그런 날이 있었는데, 그날 꿈에 하나시가 나타났다. “괜찮아. 그동안 고생했다”라며 그때처럼 까끌까끌한 수염으로 내 볼을 비비며 나를 위로해줬다. 나는 어째서인지 꿈인걸 알았다. 그래서 하나시를 더 세게 안았다. 보고 싶었다고 나 너무 힘들었다고 엉엉 우는 나를 토닥여주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 나를 위로해주러 나타났구나 너무 고마워서 기뻤고, 꿈이 너무 짧아서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