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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중년 마크 Jan 09. 2022

칼 융 said

융의 말을 보고 끄적여보기 


나의 삶은 나 스스로는 예측이 가능하다. 

오늘 이렇게 산다면 내일은 저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대략의 예측이 가능한 것은 이미 수십년간의 데이터를 통해 나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변화하고 행동하지 않는 대부분의 나의 삶은 융에 의하면 무의식에 지배되어 있는 삶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물이 낮은데서 높은 곳으로 내일 갑자기 흘러갈 리는 없다. 

인간의 생은 무의식적인 수많은 사건들로 만들어진 극장의 무대와도 같고

이 무대위에서 나는 연기하고 부르짖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 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명은 언젠가는 꺼지고 관객은 모두 떠나버릴 것이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은 의식적으로 일어나서 무대위를 누비고 다녀야 하는 연기의 당위성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된 질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만든 언어로 표현하자면 수백가지도 넘게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이고 오답이고의 기준은 없다. 

다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 스스로 하느냐 혹은 세상이 하도록 그냥 맞춰 주거나 방치할 것이냐의 차이이다. 

답보다는 질문의 주체가 나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융의 물음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정의할 수 있는 나라는 인간의 규정은 가변적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것이고 또한 오늘과 내일도 다를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그대로 있다. 

이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나 자신밖에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늘 부지런히 나를 보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합은 나의 역사라고 부른다. 

나의 역사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활을 했고 하는 모든 사건들이 

나라난 존재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설명의 도구가 될수는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의 인생은 예측가능하게 될 것이고 미래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은 사실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단지 내가 그 사건들을 일으켜 온 것 뿐이다. 

그 사건들이 모여서 나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역사는 내가 아니다. 

나는 오늘 이순간에도 다른 선택을 할수 있고, 다른 사건으로 다른 역사를 만들수 있다. 

여전히 선택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혼자 있다면 고독하다.

오롯이 나 자신의 에너지만이 나를 감싸고 있다. 

내 몸안의 정신의 온기를 불어 넣는것도, 그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혼자해야 한다. 

그래서 혼자인 사람은 고독함을 느낀다. 

소통은 에너지의 교류이다. 

자연과 타인과 사물과 모든 우주만물간의 교통이다. 

나의 사고와 정신을 외부세계와 주고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에너지의 소통을 체험할 수 있다. 

고여있지 않고 순환하는 정신의 에너지는 몸에서 피가 흐르듯이 나를 살게 만든다. 

그러니 적절하게 사고하고 

적절하게 전달하고 

또한 적절하게 소통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 안의 소위 그림자들을 발견하곤 깜짝 놀랄때가 있다. 

왜 이런상황에서 화가 나는건지, 왜 저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건지 하는 자각을 

그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 깨닫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지만

이내 얼마되지 않아 비슷한 일이 재발하곤 한다. 

나는 살면서 경험했던 나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조용히 꺼내서 상황들 안에 덮어 씌우고 있는 것일까. 

분쟁과 갈등은 나의 사고와 타인의 사고가 충돌할때 생긴다. 누가 먼저 자신의 그림자를 꺼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 당사자 모두가 각자 그림자들을 충분히 품고 있다는 게 위험한 일이다. 

가치관과 고집, 아집은 이름만 다를뿐 만들어지는 과정은 같은 것 같다. 

어떤 이는 이를 지혜라고 부를수도 있겠지만

모두에게 통용되는 지혜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만이 있을뿐.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아무 왜곡과 판단도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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