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

먼지 덮인 책에선 익숙한 냄새가 난다.

by 손에 익은

골목길 저 쪽 노란 가로등 아래로 술에 취해 비틀비틀 아버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어린 내 마음은 콩닥콩닥 불안하곤 했다. 어서 잠들어 세상 소리라고는 알 수 없는 꿈속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릴 적 오후 5시에 시작하는 티브이 만화만을 기다리던 나는 빈번하게 술 취한 아버지를 만나야만 했다.

아버지와 늘 함께 집안으로 들어오던 매캐한 담배 찌든 냄새, 몸에 배어온 술집 냄새, 술 취한 몸을 끌고 오느라 수고했을 발... 그 발은 아직 포장이 되지 않아 흙바닥을 드러낸 골목에 흙먼지를 일으켰을 테지,...

아버지는 그날의 골목과 같이 쏟아지듯 집안으로 들어 오시곤 하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즐겨하신다.

이제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서슬 퍼렇게 가족들을 긴장시키지는 못하지만 아버지가 걸어 들어오셨을 그 길에 들어서면 술 취해 함께 집안으로 들어오던 긴장의 냄새가 때때로 코끝으로 시간을 돌린다.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그것만이 유일한 무기였던 어리던 나에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에 날개를 달아 멀리멀리 가는 날은 현실의 모든 것이 낯설어 내 것 아닌 남의 삶인 듯,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 하나도 없는 싸구려로만 보였다랄까... 글을 깨우쳐 학교에 가면서 부쩍 현실은 무게감 있게 발을 잡아끌었다.

그때마다 술에 취해 들어오던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학교에서도, 친구의 집에서도, 책을 읽다가도 현재의 내게로 돌아올 때는 같은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책은 늘 같은 냄새가 난다고 착각했을 만큼 익숙한 긴장감이 책장에 가득했다.

오랫동안 낡은 책에서 나는 냄새는 책이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지를 가리는 첫 번째 기준이었다. 그 책의 작가가 누구인지 추천하는 사람의 교양 같은 것보다 그 책이 헌책방에서 얼마나 깊숙이 앉아있었나?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누런 종이는 텁텁한 먼지의 냄새를 고스란히 안고 있나? 이런 나만의 기준으로 책은 나에게 왔고, 또 내 손을 떠났다. 서점의 번쩍번쩍 빛이 나는 새책보다 헌책을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술 취해 들어오시던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던 그 날의 냄새와 오래된 책의 먼지를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꿈속으로 도망치고 싶던 그날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했던 것이리라.


술 냄새 긴장의 그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의 다정함이 그립고, 그리워서 함께 사는 동안에는 늘 흙냄새와 책 냄새를 구별하는 일은 하지 못 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나이 드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세월에 무릎 꿇고 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술이 위협적이지 않지만, 집으로 돌아오셨던 아버지의 퇴근길, 그날처럼 어스름한 골목을 걸을 때면 이미 흙바닥이라곤 자취도 없는 포장된 골목길에서 그날의 흙냄새가 진동을 한다.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골목길, 반가운 헌책방은 우리 아버지보다는 훨씬 건강하게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세월을 견뎌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기꺼이 늙어가는 길을 선택할 테지만, 내가 그리워했던 다정함과 불안함을 간직한 먼지 쌓인 책들은 시간을 견디고 나보다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헌책방을 품은 골목에는 여전히 어린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불안한 눈으로 휘청휘청 돌아오시는 그 골목을 향해 귀를 바짝 열고 숨죽인다.

나를 찾아 내주길 기다리기도....

나를 끝내 찾지 못하기를 기대하기도 하면서...


골목길 헌책방에는 그런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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