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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Jul 16. 2016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정관정요[貞觀政要] 로 본 자녀교육 - 제8장 封建制(봉건제)

1. 저울추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

이곳 국제도량형국(BIPM) 금고에는 가로·세로 각 3.9cm 크기의 원통이 보관돼 있다.

재료는 백금(90%)과 이리듐(10%)

국제도량형총회(CGPM)가 정한 1kg의 국제 원기(原器)다.

쉽게 말해,

전세계가 공통으로 1kg 이라고 하는 단위를 정하는데에 그 표준으로 삼는 유일한 원통이 보관되어 있다.

이 원통은 지난 1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국제 표준으로 정해져 자리를 지켜왔으나, 2018년 이후로는 역사속으로 살아지게 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원통은 국제 표준 저울 추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추가 이 원통의 무게와 비교하여 생산이 되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최근에 이 원통의 무게가 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형태의 추로 교체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동일한 형태일 경우 마찬가지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저울 추의 무게가 변한 까닭은 공기와의 미세한 접촉으로 인해 산화(酸化)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산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무게 추로서 전류를 흘려보내는 저울 추, 실리콘 재질의 저울 추 등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가장 신뢰받는 방법이 나타날 경우 2018년부터 새로운 표준 무게 추가 사용될 예정이다.

 

갑자기 저울추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사실 핵심은 간단하다.

결코 그 질량이 변해서는 안되는 저울 추마저 그 무게가 미세하게나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변화량은 50마이크로그램으로서 극미량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매일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유리창역시 완전한 고체가 아니라는 것을 혹시 아는가?

중력에 의해 아주 조금씩이지만 유리는 분명 아래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세월이 오래 지난 건물의 유리창을 자세히 보면 위쪽과 아래쪽의 두께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된 집의 유리창은 바람이 세게 불면 쾅쾅쾅하고 흔들거리면서 소리가 나기도 한다.

이런면에서는 어쩌면 우리 조상들의 창호지 문이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창호지 문도 변하긴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변함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것들이 아니라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는 질량 측정이라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이렇게 매순간순간 변하는 불완전한 작은 쇳덩어리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어쩌면 불완전한 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것 하나도 '절대적'이라고 호언장담 할 수 없는 것이다.



2. "왕이여! 봉건제를 고집하지 마옵소서!"

봉건제(封建制)란 군주가 자신의 혈족에게 영토와 권력을 나누어 주는 제도로서 자손 대대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然則得失成敗(연즉득실성패) 各有由焉(각유유언)
"얻고 잃는 것, 성공과 실패에는, 각기 그 이유가 있습니다"

而著述之家(이저술지가) 多守常轍(다수상철)
"저술가는 대부분 옛 법을 고집하고, 일을 융통성있게 처리하지 못합니다"

莫不情忘今古(막불정망금고) 理蔽澆淳(이폐요순)
"옛과 지금의 정황을 구별하지 않고, 경박함과 순박함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정관정요(貞觀政要) 제 8장 봉건제(封建制)-

하지만 당 태종의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신하들은 군주의 친척과 혈족들이 왕의 권력을 나누어 받아 다스린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을 가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제후들의 자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대의 혈족이 세운 공을 잊고 패역하고 사치스러운 자들이 되어 결국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게 할 것이라 간언하였다. 


다시 말해, 요즘 흔히 금수저라 불리우는 재벌 2세, 3세의 자녀들이 창업주인 아버지, 할아버지의 노고를 기리고 사업의 번성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부와 명성을 가지고 교만하여 온갖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고도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임하기보단 무엇이 잘못인지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 문제를 신하들이 왕 앞에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옛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 여기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물에 빠진 칼 위치를 배에 새겨두고 찾는 각주구검(刻舟求劒)이요,
거문고 발을 아교로 붙여놓고 음을 고르는 점주조현(粘柱調弦)과 같사옵니다.


옛법을 고집하지 말라는 신하들의 지적은 어찌보면 왕앞에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당 태종은 이들의 간언을 진중하게 수렴하였다. 옛부터 선대의 왕들이 왕권강화를 위해 지켜온 제도라 할지라도 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과감히 바꿔야한다는 당 태종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보수와 진보가 끊임없이 갈등하는 현대정치에도 분명 필요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3. "우리 아이가 그럴리 없어요"

최근 뉴스를 통해 청소년들의 범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이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아직 미래가 창창한 어린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가해자학생 부모의 태도이다.


"절대 그럴리 없다."

"우리 아이는 착한 아이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


나도 두 아이를 둔 아빠로서 자녀를 사랑하고 믿으려는 부모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믿음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사람에 대하여서 "절대" 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교육에도 절대 기준이나 절대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아이의 상황과 변화 또는 성장해가는 모습에 따라 융통성있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피교육자의 몫이 아닌 교육자의 몫이다.


최근 우리 집에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가 둘째 아이를 안아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수유도 해야하고, 아무래도 갓난아기라서 손이 많이 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큰아이 한테는 상대적으로 예전만큼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고, 본의 아니게 방치하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처음에는 큰아이가 밤마다 몸을 베베꼬며 찡찡대는 것이 단순히 피곤하고 졸려서 그런줄 알고, 애써 재우려고만 했다. 그런데 도무지 잠을 자지 않고 오히려 찡찡거림은 더 커지고 아이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상하다, 이레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럴 애가 아닌데.. 왜이러지.."

그렇게 잠을 아무리 재우려해도 자지 않던 아이가 결국 참고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큰 아이의 모든 행동이 피곤하고 졸려서가 아닌, 동생을 돌보는 엄마, 아빠에게 질투를 느껴서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큰 아이가 당연히 동생을 사랑하고 배려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사전에 이러한 상황들이 생기지 않도록 육아 백과사전같은 책에서 나온대로 큰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설명을 해주었으며, 충분히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육아 백과사전은 참고 서적일뿐, 정답이 될 순 없었다.

아이를 키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이론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며 아이의 상황을 잘 살펴야만 알맞은 양육을 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이 이렇게 중요한 일에 명확한 기준이나 지표가 없다는 것은 정말 마음에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말이지 모든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께 경의을 표하고 싶다.



4. 첫 눈 내리던 날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7-39-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의 인트로에 소개된 성경구절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의 이를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의심하여 믿지 못하였던 "도마"라는 제자에게는 직접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시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믿음을 고백한 후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면 복되다고 말씀하심은 보고, 만지고나서야 믿은 도마와 제자들은 복되지 않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도마를 꾸짖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다.

도마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가 믿을 수 있도록 친히 만져보라며 몸을 보이신다.

잘못 오해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증거 없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더 강조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씀에 기반한 믿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곧 성경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의 모든 세대는 예수의 죽음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들의 믿음이 모두 증거없는 것, 헛된 것이라 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말씀을 증거로, 말씀을 믿고, 말씀을 전하는 신앙이다. 다시말해 모든 증거와 근거는 성경에 기반한다.


우리가 자녀를 대할 때에도 자칫 잘못하여 무조건 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자녀의 잘못과 실수에 대하여 그럴리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과오에 대한 결과이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자녀가 낳은 행동의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연유와 사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때로 나의 부모님 세대는 "나 때는 다 그랬어, 옛날에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라며 우리 세대의 경험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할 때가 있다.

물론 그 말들이 맞을 수도 있다. 

지나고나서 보면 정말 별일 아닌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이 겪고 있는 현재가 보잘 것 없다고 하기엔 그들이 감당해야 할 경험치 대비 삶의 무게가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부모는 알아야 한다.


첫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에게 첫 눈은 더이상 설레임이라기 보단 그저 매년 열리는 연례 행사처럼

그렇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낭만보다는 출근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 아침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아들 이레의 눈은 나와는 달랐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한 그야말로 첫 눈이었던 것이다.

동그란 두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하늘하늘 내리던 눈을 바라보던 귀여운 이레..!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이

이 작은 아이에게는 항상 새롭고 놀랍게 다가옴을 미처 몰랐다.

풀잎, 나무, 개미같은 작고 사소한 풍경의 변화라도

이제는 작은 나의 아들을 위해 천천히 감상하며 가던 길을 멈춰 줄 수 있는

아빠가 되어주고 싶다. 


세상은 여전히 변한다.

그것에 우리는 무뎌져 갈 뿐이다.

영원한 것도 없고,

절대적인 가치도 없다.

매 순간을 당연한 것 처럼 넘기며 살아가기 보단

그 순간이 주는 가치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자녀가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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