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성장의 아이콘'으로 꼽고 있는 도서, 호밀밭의 파수꾼. 은둔 생활을 좋아하던 신비주의 작가 J.D. 샐린저가 써낸 장편소설로 존 레논을 살해했던 마크 채프만의 가방 속에서 발견되어 살인을 종용하는 책이란 누명을 쓰기도 했다. 교회나 학교에서는 금서로 지정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이 책은 내게 좋은 어른이 되는 지침서로 다가왔다. 왜 대표적인 성장 소설로 꼽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고전 소설답지 않게 술술 읽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라 생각한다.
홀든 콜필드는 왜 이럴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고 올리니, 나의 친한 친구 H는 '젊은 날의 우울'을 담아낸 책이니, 이 책을 읽고 나면 즐거운 책을 찾아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책을 완독 했고 이 책이 우울함의 나열로 그치는 단순한 책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매우 감명 깊게 읽었기에 이렇게 독후감을 남겨본다.
홀든은 네 번 퇴학에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다정한 부모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동생 피비,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형 D.B.,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이 책을 읽으며 홀든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은 힘든 시기에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어린 시절엔 옳고 그름을 조언해주는 길잡이가 많지 않았다. 다소 엄하게 느껴졌던 부모님 외에 기댈 수 있는 길잡이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홀든은 왜 어린아이들의 길잡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걸까? 다른 어른들과 똑같이 어른이 되고 싶은 걸까?
당신의 홀든 지수는 몇 점인가요?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홀든 콜필드가 있다.
겉으로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지만 동시에 속으로는 '으, 꼰대.'하고 마는 반항적인 자아. 나는 그것을 홀든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면의 홀든 없이 살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깜깜한 감옥과 다름없다. 이 책이 쓰인 1950년대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부유했던 부흥과 순응의 시대였다고 한다. 정치적 보수주의가 난무했고 사랑이 넘치는 전형적인 '가정'의 형태가 중시됐다. 겉으로 보기엔 화목해 보일지 몰라도, 행복이나 부유함이 특정 조건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다름이나 다양성 같은 것은 이단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호밀밭의 파수꾼>이 재즈, 술, 마약 등 향락에 빠졌던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염원을 담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나는 홀든이 겪은 감정의 동요가 청춘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생이 되면, 성인이 되면, 직장인이 되면, 그리고 부모가 되면,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성숙한 자아가 지게 되는 책임감의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역할에 따른 책임. 홀든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은 채 어른이 되기 위하여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싫고 나와 맞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한 불만들을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서러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공허함을 잃지 못하는 홀든이 안쓰럽다.
홀든이 형 D.B. 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형은 할리우드,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상징 속에서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홀든에게 형의 업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어른의 전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간직하며 정직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줄 아는 홀든에게는 당연히 낯설고 부담스러웠을 수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홀든이 사회 부적응자로 해석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은 좋은 어른인가요?
나는 호밀밭이 파수꾼이 좋은 어른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이의 순수함을 잃거나, 극단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이의 순수함은 '경험하지 못함'에서 오는 순수함으로 개인적, 사회적 경험에 따라 언젠가는 하나둘씩 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른의 역할은 아이가 지나치게 잘못되지 않도록 정도와 선을 알려주는 것에서 그쳐야 한다. 어쩌면 홀든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이 바로 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스펜서 선생님이나, 앤톨리니 선생님 같은 좋은 어른들이 있지만, 이들은 홀든의 이야기를 200% 들어주고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은 아니었다. 물론 앤톨리니 선생님처럼 다른 시각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줄 만큼 인내심 있는 어른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언도 언제나 '선생'이라는 권위 하에서 이루어졌다.
성숙한 어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시간 나이를 먹지만 동시에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퇴화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기억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청춘의 어느 순간은 누구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리운 시절이다. '마음만큼은 스무 살이야.'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때의 순수함이 영원히 살아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홀든은 결국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것이다. 청춘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써나가고 있는 지금처럼. 어른이란 나이먹음에서 오는 경험의 가지 수가 많을 뿐, 나이나 사회적 지위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이야기해주진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 어른 짓 하지 말자. 불평불만은 속에 담지 말고 적당히 표현하자!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 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책을 읽기 어렵다면 아래 영상도 참고해주세요 :) 개인적으로 생각 정리에 도움이 많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