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이너 문신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고통의 순간이 있다.
내 인생 최대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한창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많은 24살 나이에 아이라이너 문신에 대해 알게 됐다.
늘 아이라인을 그리는 데 귀찮음을 느끼고 있을 때라 얘기를 듣고 솔깃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하자, 로 바꾸는 건 금방이었다.
그날은 아이라인을 그린다고 출근 버스를 놓친 날이다.
여러 군데 인터넷 검색을 해서 괜찮다 싶은 곳을 찾았다. 가격도 내가 보기엔 합리적이다.
바로 예약을 잡고 월차를 냈다.
위치를 검색해서 찾아가며, '이런 곳에 있네.' 생각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어느 상가 1층에 위치한 피부 관리숍이다.
낯선 동네에 위치한 가게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피부관리와 아이라이너 문신을 같이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상이 좋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인사를 해왔다.
예약을 확인하고 바로 피부관리숍 특유의 베드에 눕게 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누워있는 내 눈에 먼저 마취 크림을 발랐다.
이상태로 15분만 있으라고 한다.
나는 처음 받아보는 시술에 대한 두려움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다 지났는가 아주머니의 시술이 시작되었다.
나는 무서워 아주머니가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점막에 바늘이 뚫고 들어와 색소가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참지 못하고 발버둥을 쳤다. 너무 아팠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마취 크림을 제대로 바른 게 맞나 의심스러웠다.
나는 바로 마취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걸 아주머니에게 열렬하게 어필했다.
결국 시술을 멈추고 다시 마취 크림을 바르고 기다렸다. 그리고 이젠 더 기다려도 의미가 없다며 아주머니는 다시 시술을 시작했다. 이젠 아파도 멈추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취크림의 효과는 별다를 게 없었다. 계속 아팠다. 아주머니는 아파하는 나의 발버둥도 뛰어난 프로의식으로 무시하는 듯했다.
고통 속에서도 나는 얼굴만은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얼굴은 꼼짝하지 않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고통을 참아냈다.
받으면서도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내가 이걸 하면 사람이 아니다.
나처럼 아파하는 사람이 처음이었는지, 아니면 늘 있던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양쪽 다 끝나고 나선 아주머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오분도 안 걸린 시술로 나는 혼이 나가 있었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린 나에게 아주머니는 3개월 후에 한번 더 받으러 와야 한다 말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일단 나중에 연락 준다 말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비용을 지불하고 나왔다. 오만 원이다.
그 후에도 통증에 아파하며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부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자기 전까지 얼얼한 느낌에 다음날 출근부터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걱정대로, 다음날 내 눈꺼풀은 마치 송충이가 앉은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거기다 피 멍이 들어 있었다. 정말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단결근을 할 수는 없으니, 출근을 한다.
역시나 보자마자 직장동료들이 난리다. 눈이 왜 그러냐면서,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냐면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며칠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고 아무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말을 스스로 했다.
나중에 다들 이렇게 붓는 건지 검색해보니 나같이 심한 경우는 드문 모양이다.
겨우 지식인 같은 데서 나온 말로는 감염이나 잘못된 시술로 인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프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잘못 선택한 건가. 이미 일어난 일에 후회를 하긴 늦었다.
그리고 그 부기가 가라앉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
당연히 3개월 후에 그 아주머니에게 다시 가는 일은 없었다.
거의 9년이 지났나.
아직도 내 눈엔 아이라이너 문신이 선명히 남아있다.
그 아주머니가 전문가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선명한 문신을 새겨 주었다.
덕분에 민낯으로 다녀도 편하다.
하지만 이 문신이 희미해지는 날이 와도 나는 다시 아이라이너 문신을 받으러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아픔을 참는 덴 서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