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산책의 효용

by 호시절

약속이 취소된 날, 은근 기뻤다. 오늘도 산책할 수 있다! 별다른 일이 없는 여름날엔 꽤 정확한 나만의 루틴이 있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쉬다가, 8시와 9시 사이에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간다. 방향은 두 곳으로 향한다. 오늘은 광화문이냐 홍대냐. 책을 보고 싶은 날이면 광화문까지 걷고, 사람들 사이에서 걷고 싶은 날이면 경의선 숲길을 따라 홍대까지 걷는다. 산책의 사전적 의미는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라는데, 사실 내가 하는 건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소요에 가까운 행위인 듯하다. 그러나 '건강'의 범주에 마음 건강이 포함된다면, 산책이라 퉁치자.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은 걸 꼽을 수 있겠지만, 딱 한 가지만 고르라면 '산책'이다. 그것도 밤에. 겨울보다 해가 늦게까지 떠 있는 여름엔 뜨거웠던 낮의 기운을 시원하게 털어버릴 '밤'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 온도의 간극은 종종 짜릿한 기분이 들게 한다.

대학생 때에는 과행사가 그렇게 귀찮고 싫은 것이었다. 과행사 때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싫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중구난방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가끔 선배들이 과행사에 오라고 부추길 때,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고 서울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걷기도 했다. 역삼에서 방배까지, 사당에서 도림천까지, 한강 어느 부근에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스무 살 때부터 산책을 너무 좋아했기에 친구들에겐 할매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술 먹자고 밤에 전화하면 혼자 산책, 고민상담 전화받을 때도 혼자 산책, 여행을 가서도 타지에서 겁도 없이 혼자 산책, 산책, 산책...

산책의 효용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다양한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산책은 오감을 깨운다. 귀로는 바람소리, 코로는 풀내음, 눈으로는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하면 너무 뻔할 테고. 일단, 집에 나가기 전부터 이어폰을 장착하고 랜덤 재생을 누르기에, '귀'는 아웃. 원래 냄새는 잘 못 맡기에 '코'도 아웃. 산책 중엔 묵언수행 이기에 '입'도 아웃. 사실 나의 산책은 철저히 '눈'으로 담는 걷기이다.

자주 가는 경의선 숲길은 세상 다양한 견종들의 모임 장소이다. 두 눈으로 바쁘게 그 모습들을 열심히 주워 담는다. 단순히 동물이 너무 좋아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어린 날을 떠올려본다. 언니와 나는 늘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자고 주장했지만, 엄마는 완강히 거부했고, 주구장창 비스무리한 동물들만 집에서 키웠던 적이 있었다. 고맙게도 산책은 이런 욕구를 어느정도 해소해준다. 똘망한 말티즈, 촐랑대는 치와와,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웰시코기의 뒤태. 가끔 도베르만인 것 같은(?) 개가 늠름하게 걸어가면 주인을 한번 쳐다보게 된다. 그 이유는 뭘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행여나 주인을 앞서며 주인을 산책시키는 강아지들을 보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강아지 반, 사람 반인 곳에 가끔 털끝이 정돈되지 않은 길냥이들도 보이는데, 얘네는 사람 손을 타서인지 다가가도 절대 피하지 않는다. 정말 드물게 목줄 달고 나온 고양이도 있었는데, 생경한 모습에 한참을 쳐다봤다. 동물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마침 가로등이 보인다.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군데군데를 비추고, 그 사이로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을까. 저 사람은 걷는 모습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오늘 힘들었네. 짐작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양옆 길 따라 보이는 노상 맥주집들과 편의점은 그야말로 천국의 모습. 산책하다 유혹에 못 이겨 엄마와 뻥튀기에 맥주 한 잔 하던 날이 떠오른다. 옆자리에 조용히 끼여서 혼자서라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청승은 그만 떨자 다짐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동네 친구가 절실해’라고 푸념하며 다시 걷는다. 직장상사가 알려주었던 꽃들도 그제서야 눈에 띈다. 주황색에 노란 빛이 듬성듬성 있는 저 꽃이 원추리였구나. 예쁘네. 그러다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바다에 빠진 것같은 기분이 든다. '푸르다'라는 단어로만 묘사할 수 없는 저 모습은, 소중한 이에게 당장 전화해 "지금 하늘 좀 봐."라고 말해야만 비로소 설명되는 것이라.

그러나 산책이란 녹빛이 보이는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은근한 맛이 있는 산책은 내가 사는 도시의 낯들을 보는 것이다. 집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길 따라 애오개-아현-충정로-서대문까지. 곳곳에 보이는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의 모습과 철길은 목적지인 광화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재개발된 구역엔 역시나 비까 번쩍한 아파트들이 계속 채워지고 있는데, 아현동 그리고 저 너머의 만리재에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그러다 중간에 보이는 작은 규모의 꽈배기 집은 문득 속삭인다. 지금 아니어도 괜찮으니, 날 포장해가렴. 그에 대한 답가. 어차피 돈을 지불하는 순간 꽈배기를 먹는 시간은 여지없이 '지금'이 될 테니, 눈으로만 담아갈게. 다음에 또 말 걸어주렴. 그렇게 다다른 광화문 교보문고는 이제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가는 곳이 되었다. 한 시간 정도 가판대에 무슨 책들이 올라왔나 구경도 하고, 책도 보고 놀다가 집으로 다시 걷는다. 서점에서도 천천히 걸으니, 실상 산책은 계속되는 것이다. 행여나 서점에서 놀다가 시간이 지체되면, 산책은 서점에서 마무리 지어진다.

산책했던 장소들을 적고, 그곳이 좋았던 이유를 쓰라면 모두 구구절절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좋은 산책길은 꼭 누군가와 다시 걷게 된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그날의 기분을 가라앉히곤 한다. 내가 했던 행동과 말을 복기해보고, 잘못된 부분은 없었는지,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이 진짜 내 것이었는지, 사람들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을 보며 정리해본다. 역시 ‘산책 중 눈으로 담은 것들과 그것에 따라오는 생각들은 큰 위로가 된다.’고 결론지으려 했는데, 마침 걷던 중 고향 친구의 연락

"야, 어디야? 또 산책함?"

"나 경의선 숲길 ㅎㅎ"

"그곳은 눈에서 눈물이 그냥 막 그냥 흐르는 곳"

이라고 놀렸다. 음, 기억의 왜곡인가. 돌이켜보니 산책과 함께한 흑역사도 많았던 것 같다.

이상 산책하는 와중에 적은 프로산책러의 산책찬양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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