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연다. 검은 띠가 둘려진 펠트 중절모를 꺼낸다. 흑갈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찾아 입는다. 신발장에서 꺼낸 검정 하이힐 구두를 신고 거울 앞에 선다. 나는 지금 열다섯 살 반, 이 아닌 반백의 나이에 <연인>이라는 책과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다. 목련은 벌써 지고, 벚꽃이 폭죽처럼 터지려고 만반의 준비가 된 어느 봄밤이었다.
봄밤은 춥다. 소설에 취한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옷을 입고 바바리코트를 걸쳤다. 남천을 따라 줄지어 핀 벚꽃나무를 찾아 걸음을 옮긴다. 요염한 빛이 남천에 어린 경산의 달밤은 그녀가 인도양을 건너며 마주한 풍경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던 쇼팽의 왈츠곡이 남천의 윤슬에 내려앉는다. 바람에 흩날리던 벚꽃잎들이 교교히 흐르는 물결에 함께 얹힌다. 봄이, 흐른다.
봄 때문이다. 볕 좋은 자리에 벌써 라일락이 향기를 날리고, 생강나무가 노랗게 산 중턱을 물들이더니, 분홍빛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봄으로 인해 마음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 때쯤, 하필이면 <연인>을 만났다. 열어 둔 창으로 중산지의 바람이 흐르고 샛별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묵묵히 책을 읽었다.
어린 소녀의 삶과 첫사랑의 메시지는 생각보다 얇은 책 속에 함축되어 있다. 나는 천천히 한 장씩 넘기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베트남에서의 발자취를 상상했다.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오감을 깨우고 心감이 절정에 이른 문장에서 나는 읽기를 멈추고 한참을 머물렀다.
가족들과 있을 때 절대 울지 않는 그녀, 그와 함께 한 그날 그 방 안에서, 그.녀.는. 울.었.다. 블라인드를 통해 저녁이 찾아올 때까지.
뒤라스의 문장은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일찍 늙어버렸다는 문장을 삼키는 데 꽤 많은 슬픔이 오버랩됐다. 고작 열다섯 살 반 소녀의 삶이 내게 건너와 나를 흔들고 갔다. 나는 타지도 않은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책 멀미를, 글 멀미를 심하게 했다. 인생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은 가끔 연인이 필요하다. 그녀가 쉴 새 없이 보내는 신호를 책의 행간 어느 지점에 이르러 나는 읽고야 말았다.
누군가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생은 없다.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는 인생을 항해하며 나름의 항해 일지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 뒤라스처럼 연인을 만난다면 후회하지 않을 삶이었다고 담담히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날, 나도 나이 들었다. 나이 들어 사랑을 알게 된 것인지, 사랑을 깨달아 나이 들어 버린 건지 알 수 없다. 가끔 세상은 봄스럽다가 다시 겨울이 온 것처럼 뒤죽박죽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지금은 충분히 청춘을 건너온 덕에 넉넉히 봄 마중을 한다. 해마다 나의 심장에 삶의 의미를 수혈하는 봄이 지금, 천지에 가득하다.
주저하지 않고 다가오는 사랑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생은 아름답다.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말이다. 연분홍 꽃배들이 줄지어 천변을 유람하는 밤, 그녀에게 그가 연인이었다면, 나의 연인은 식물들의 생애를 껴안은 봄,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