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들의 시간

by 글똥

겨우 도착했다. 성주에서 경산까지 오느라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현장에서 그 모든 시간들을 목격하였던 우리였기에 감히 말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것은 때로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면서 사랑을 주고받고 마음을 이어준다는 것을.

오늘 우리들이 보고 들은 사건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또 다른 스토리라고 해도 되겠다. 이제 몇 개 안 남은 냉장고 야채칸의 내 친구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우리들의 이야기는 기록되어야 한다. 잊히지 않기 위해.


-경아, 참외 너 가가라

-엄마, 갈 시간이 엄따. 마실에 누구 줘라

-참외 조은 기다. 마실에 은택이가 바로 따서 갖다 준기다

-엄마, 드갈 시간이 엄따

-그라마 택배 보내 주께

-초전에 구루마 끌고 못 간다. 힘들어서 안된다

-가마이 있어 봐라. 너거 아부지 바까 주께


딸이 사는 곳 주소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잘 못 알아들으신다. 자꾸 엉뚱하게 적는다. 우리는 소리 질러 말했지만 할아버지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거실의 바구니 안에서 친구들이 노란 몸들을 들썩이며 고함을 쳤다.


30분이 훌쩍 지났다. 친구들은 아까보다 더 노랗게 익어 아직도 진행 중인 전화 소리에 몸을 기울이고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번갈아 전화를 바꿔 가며 딸과 통화 중이다. 얼마나 크게 말하는지 바구니 속에서 잠자던 아기 참외들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반복하며 같은 주소를 불러 주다가 건너편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자꾸 "잘 안 들린다. 크게 말하라"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경산으로 왔다. 택배 기사는 비가 와서 이틀이나 우리를 차에 실어 두었다. 생물인 우리를 이틀씩이나 가두어 둔 게 괘씸했지만, 물건을 받은 딸은 냉장고에 곱게 우리를 넣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건강하려고 애를 썼다. 그날부터 그녀가 다니는 직장으로, 친구들의 모임으로 우리들은 대여섯 개씩 빠져나갔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한 조각이 되어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맛있게 먹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내 외침을 그녀가 듣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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