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 가면 제일 먼저 섭렵하던 잡지. 주로 내가 본 것은 여성 동아와 여성 중앙. 그 외에도 다양한 잡지들이 헤어 커트를 기다리는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었던. 결혼과 양육으로 살던 곳을 벗어나지 못했던 내게 잡지 속 세상은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편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나는 한 때의 그 세상을 '종이 여자'*로 표현했다. 미용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비밀 통로 같은 곳이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던 언니가 정기구독으로 보내주는 책보다 유독 미용실이라는 공간에서 읽는 책, 그것이 내게 주는 기쁨은 특별했다.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수다와 염색약의 특유의 냄새와 어우러진 문장들이 미용실이라는 공간에서더욱 펄떡거리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꿈틀거리는 문장들을 천천히 씹어 먹으며 즐겁게 나의 순서를 기다렸다.
1995년, 그때 나는 24살이었고 바다 건너 프랑스의 엘르지의 사장 장 도미니트 보비는 마흔 초반의 사장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찾아온 뇌출혈로 로크드인신드롬 환자가 되어버린 남자.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내가 작년, 암에 걸린 것처럼. 온 몸에 마비가 왔고 한쪽 눈만 깜박거리는게 전부인 그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겨우 암이라니. 그런데 이 작은 암으로도 나는 꽤 심각한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어둠 속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수술실에 누워 암덩어리를 도려내고 방사선 치료를 끝낸 후, 지금 나는 이전과 다름없는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멀쩡한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으로 글을 쓰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도 있다. 사람에게 가장 감사한 일은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당연한 삶이 감사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삶은 모든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챕터마다 그의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건강한 그의 시절과 사고 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모든 사진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날개를 접은, 펼친 나비들이 꼭 한 마리씩. 잠수종과 나비. 엘르지의 사장답게 그의 은유는 매우 아름답다. 슬픔을 간직한 자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스며드는 삶의 묵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강렬하게 각인된다. 잠수종, 다이빙 헬멧을 쓴 한 마리 나비가 내 삶으로 날아온다. 로크드인신드롬, 내 삶의 닫힌 세계를 다시 한번 감사로 열어보게 해 준 낱말. 그의 삶은곧장 내게로 와 나의 푸른 나비가 되었다.
영화를 보았다. 프랑스 영화는 여전히 어렵다. 그들이 성적 분방함을 예술이라 표현하는 지점을 찾아 내기가 힘들다. 내 정서에 반하지만 그럼에도 예술의 그 어느 지점에 발끝이라도 담그고 싶어 애써 몇 편을 본 게 다다. 이미 오십을 넘은 나는 마흔넷의 마지막 그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닿고 싶어 영화 속의 그를 만난다. 전신마비에 왼쪽 눈으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그의 상황이 글보다 훨씬 잔인했다. 먹먹하다는 말은 때로 가볍다. 침묵도 어설프다. 겪어보지 않고는 공감할 수 없는 인생. 우리, 너희, 그들이 아닌 '나'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 그의 슬픔이 나의 것이 되려면 최소한의 고통과 경험이 내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삶이 잠수종이라 여겨질 때가 있었던가.
나의 잠수종과 나비. 내 현실의 밥벌이의 무게. 그것을 이겨내는 독서와 글쓰기. 이 둘의 관계는 어느 날은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또 다른 날은 빙글빙글 한꺼번에 돌다가 뒤죽박죽 섞여 버리기도 한다. 현실이 없으면 상상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잠수종으로 명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존재. 그것을 견뎌야 비로소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잠수종과 나비에서 또 다른 나의 바다와 하늘, 무수한 나비의 날갯짓을 상상한다.나의 집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