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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Mar 25. 2024

3월 25일 월요일 날씨 : 비


때때로 어느 특별한 날을 기록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게는 비 내리는 날이 그렇다. 어제 오후에는 병아리 눈물만큼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대지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지만, 나는 좋았다. 그 짧은 시간에 땅은 제법 젖었고, 운이 좋게도 그 땅을 밟으며 귀가를 했다. 아파트에 살면 비란 녀석이 살며시 왔다가 가버린 것을 항상 뒤늦게 안다. 튼튼한 이중창은 바깥의 소음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소리들도 완벽하게 차단해 버린다.


오늘은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날은 찼지만, 건물의 1층에서 바라보는 비는 참 낭만적이다. 평소에는 입에도 안 대는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일단 밖으로 나간다. 바로 코앞에서 내리는 비를 영접한다. 처마에서 방울져 내리는 비와 젖은 땅, 내 손의 커피 한 잔이 봄비와 삼합이 된다. 음식만 삼합인가. 생에도 삼합이 있다. 생의 삼합은 재료조차 하늘이 내려주어야 비로소 즐길 수 있지만, 그것을 버무려 즐기는 자도 흔치 않다. MBTI의 성향이 또 그걸 받쳐 주어야 한다. INFT에 가까운 나는 이 타이밍을 잘 캐치한다. 나는 참 복도 많다.


영대숲을 함께 산책하는 친구에게 톡을 넣었다. 나보다 한 수 위의 감성을 가진 친구는 벌써 영대숲을 몇 바퀴 돌았고, 민속촌 툇마루에 앉아 종일 낙수를 즐기고 있었다. 생업으로 직장에 매인 몸만 안타까울 뿐. 마음으로 함께 비를 즐기고 있는 우린 이미 낭만파다. 친구가 대구로 이사를 가고부터 매주 서너 번씩 다니던 숲길을 보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갔다. 이제는 계절에 한 번씩 갈 만큼 둘 다 시간에 쫓기며 산다. 먹고사는 일이 이렇게 분주한 나날, 비는 직진의 내 삶에 브레이크를 거는 훌륭한 제동장치다.


대지를 적시는 봄비는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유록의 잎들, 터질 듯 말 듯한 수많은 꽃봉오리들, 땅 속 깊이 뿌리내린 새싹들에게 봄옷으로 갈아입으라는 하늘의 공식 발표다. 내일까지 비가 온다는 기상청의 발표를 나는 굳게 믿는다. 수요일부터 따뜻해질 거라는 말에도 신뢰의 도장을 쾅 찍는다. 봄은 비와 함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일으킨다. 뒤뚱뒤뚱 겨울의 꽁무니를 따라 걷고 있는 나를 툭툭 치며 발끝을 적시는 봄비가 그래서 반갑다. 잠자던 마음의 마중물이 되어 활력의 생각들을 울컥울컥 쏟아낸다.


만물과 소생을 봄비에 접붙인다. 세 개의 낱말이 주는 힘으로 나는 내일도 살겠다. 남은 3월을 기꺼이 보내고 4월을 맞이할 힘까지 얻겠다. 그대를 향한 나의 말에도 잎이 나고 꽃이 피겠다.


해도 달도 별도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어둠을 타고 비는 신나게 내리고 있다. 3월이 흠뻑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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