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똥 Feb 11. 2021

봄은 미나리처럼

            

바야흐로 봄이다. 물 댄 논에 미나리가 초록의 대를 열고 마디를 키운다. 햇살 한 꼬집과 바람 한 꼬집씩 먹고 어느새 훌쩍 자란 미나리는 다름 아닌 봄의 전령이다. 매화 망울이 톡톡 터지기 시작하는 참 좋은 시절에 봄은, 향기 품은 미나리를 앞세워 오시는가.


길에 펼쳐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봄의 풍경을 만든다. 웃음이 넘실거릴 때마다 논두렁에 잠든 풀잎들이 잎맥을 세운다. 겨우내 웅크렸던 뿌리가 밀어낸 잎들의 푸른 잔치가 길가에 늘펀하다. 땅에서는 초록이, 앙상하던 가지 끝에는 핑크빛 꽃망울이 세상의 도화지에 봄 칠을 하고 있다. 사람도 자연도 봄 앞에 제대로 바람났다.


불판이 뜨겁다. 비닐하우스를 뚫고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도 그만큼 달아오른다.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고 고기를 굽는다. 경사진 불판 아래로 흘러내리는 기름과 한 몸이 된 미나리가 진한 향을 공중으로 날린다.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는 손이 흥겹다. 미나리에 듬뿍 된장을 바르고 잘 익은 돼지고기 한 점을 올리고 건배를 한다.


웃음이 폴짝거리며 공기 사이를 떠다닌다. 고기가 익고 새 고기가 올라오는 동안에 아삭거리며 씹히는 미나리 소리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한껏 즐긴다. 어깨를 누르던 세상의 짐이 한 꺼풀 벗겨진다.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던 눅눅한 사람의 냄새가 햇살 앞의 먼지처럼 툴툴 털려 나간다. 잘 익은 고기의 든든함과 미나리의 맛이 몸 안에 가득하다. 겨울 동안 숨겨 둔 몸의 것들을 봄 햇살에 곱게 펴 새롭게 시작해도 되겠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다. 개구리가 폴짝거리며 뛰어다니고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나고 아이들은 제 키만 한 가방을 매고 입학한다. 매서운 겨울 앞에 속수무책으로 잠자던 모든 것들이 기지개를 켜고 모습을 드러낸다.


열심히 살았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풀이 죽은 실패자들을 다시 일으키기엔 봄만 한 것이 없다. 취업에 실패한 아랫집 청년, 아직도 전셋집을 전전하는 가난한 옆집 부부, 경단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로하기에도 봄이 적격이다. 늘어진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한 번에 일으켜 세우는 레시피는 거창하지 않다. 손을 잡고 한 걸음, 어깨 걸고 두 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여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인생의 오묘함을 발견했을 때 삶의 기쁨은 감격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기쁨이란 것은 풍요로운 물질의 구속을 벗어나 자연에 몸을 누일 때 절정에 이른다. 물욕을 품고 살아가는 각진 세상은 제멋대로 피어난 자연의 속성을 거부한다. 때를 기다려 맛볼 수 있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발견하는 생의 미학은 어쩌면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느린 마음으로 보는 비닐하우스 안의 풍경은 모두 아름답다.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걸음을 내딛던 세상이 아니다. 모두가 마음의 긴장을 한 더께씩 내려놓고 발그레한 얼굴로 허리띠를 풀어 한 칸씩 늘린다. 뱃심을 든든히 다지며 소소한 이야기로 너털웃음을 짓는 곳에서 내 허리도 긴장을 늦춘다. 늘어난 뱃살에는 세상 행군에 필요한 온갖 전투 장비가 채워지는 중이다.


햇살과 바람을 거느리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봄이 말한다.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보내며 오래 기다린 그대여! 삶은 날마다 행복과 불행이 피었다 지고 희로애락이 들락날락하면서 기어이 깊은 맛으로 익어가는 것이니 봄이 미나리처럼 올 때 그 풍경 속으로 냉큼 걸어가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4월, 목단에 스며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