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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Apr 18. 2021

4월, 목단에 스며들다

오십, 라일락보다 목단

봄을 맞으려 만물이 들썩이는 시간, 담배꽁초와 휴짓조각이 널브러져 있던 주차장 한 편의 화단이 말끔하게 정돈돼 있다. 폐허 같던 자리에는 또 누군가 심어놓은 씨앗이 뾰족뾰족 고개를 내밀고 초록 새싹들이 점점이 자라는 중이다. 대를 밀고 벌써 소담스럽게 꽃을 피운 녀석도 있다.    


덕분에 올해 봄은 초록의 잎맥이 주는 싱그러움을 먼저 눈에 담고 밥벌이를 시작한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보내고 누리는 호사 중 하나다. 요즘처럼 볕이 푼푼한 날은 봄 햇살에 움트는 작은 생명을 들여다보는 재미에 삶이 더욱더 한갓지다.    


철조망 너머, 하루가 다르게 몸피를 키우던 줄기가 잎을 펼치고 망울을 맺더니 못 보던 며칠 새 몽우리를 활짝 열었다. 목단이다. 자줏빛에 홀려 성큼 화단으로 발을 들였다. 손바닥보다 큰 잎들이 시원스럽다. 잎들 위에 살포시 앉은 오후의 그늘이 꽃을 더욱더 빛나게 한다. 가까이 보니 초록잎의 호위 아래 목단  한 송이, 거침없이 몸을 열고 햇살 마중 중이다. 저 고혹적인 자태라니!    


화단이 초록의 융단으로 조금씩 변해 가는 동안, 봄비도 서너 차례 반갑게 내렸다. 키 작은 초록 땅꼬마들과 눈인사를 나누면서도 몰랐다. 주차하고 급히 들어가는 나를 수백 번은 더 불렀을 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설마 저 좁은 땅뙈기가 어느새 붉은 목단 이불을 펼쳐 놓고 날 초대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탐스럽다. 하늘 향해 한껏 펼친 꽃잎들은 한 장 한 장이 구체관절 인형처럼 자유롭고 신비롭다. 노란 수술의 꽃가루가 선명한 자태로 암술을 둘러싸고 중심을 지키는 까닭이다. 노란 분가루가 묻은 목단의 붉은 몸을 보고 있으니 생전 처음 곱게 분칠하고 시집가는 새색시 같다. 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 처음 화장하고 나설 때의 내 모습도 저러했겠구나 싶다. 주체할 수 없는 봄날의 노란 꽃가루가 붉은 목단의 솜털이 되어 그 시절 내 마음에 나풀나풀 내려앉는다.    


목단이라는 꽃을 처음 본 것은 어릴 적 엄마의 장롱에서다. 목화솜을 넣은 이불이 아주 무거웠지만 외풍으로 추웠던 시골집에선 누구나 솜이불을 덮었다. 방청소를 하고 언니가 이불을 깔면 빨간 내복 차림으로 후다닥 아랫목을 차지한다. 곱게 수 놓인 꽃이불을 덮고 누우면 내가 꽃에 들어가 잠자는 엄지공주가 된 것 같았다. 목단의 꽃말 중에는 '행복한 결혼'과 '부귀영화'가 있으니 아마 그 이불은 결혼을 앞두고 외할머니가 혹은 엄마가 손수 놓은 수였을 것이다.     


4월생인 나는 늘 라일락 꽃향기에 취해 생일을 기억했다. 보랏빛 꽃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멀리서도 그 향을 알아봤다. 은은함이 사방으로 번질 때는 내 마음도 라일락꽃이 되어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 4월의 하늘과 나무, 유록색의 잎들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실려 봄을 즐겼다. 내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라일락이 소리 없이 이별을 고할 때까지 내 마음은 소녀감성에 젖어 매일 기뻤다.    


결혼과 출산과 양육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오십이 된 어느 봄날이었다. 라일락이 아직 한창인 시절, 기억 너머의 자줏빛 목단이 불쑥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목단은 알았을까. 이제는 내가 자줏빛 탐스러운 한 송이 목단을 좋아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가볍게 흩날리는 라일락보다 조금은 묵직한 태도로 앞으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소녀 감성의 라일락보다는 기품 있는 중년의 우아함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나의 두루뭉술한 허리선과 날렵하지 않은 걸음걸이를 지켜보았을 4월, 그리하여 해와 달의 기운을 급히 빌려 겹겹이 피어난 붉은 목단이 반백의 생일에 즈음하여 시방 마음속까지 불콰하게 제대로 번지는 중이다. 에헤라디야,  단언컨대 오십의 4월 누가 뭐래도 라일락보다 목단이로소이다!


지금 목단은 낱장의 꽃잎을 한껏 펼쳐 남은 봄을 연주하고 있다. 하여 오십의 누구라도 홀릴 수밖에 없는 유혹 속으로 나는 성큼 걸어 들어간다. 오늘은 꽃 속에 갇혀 목단과 나, 우리들의 이야기를 밤새 써 내려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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