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말하다

by 글똥

아직은 겨울, 봄이 오려면 한참 멀었다. 나무들이 옷을 몽땅 벗은 지 불과 얼마 전, 이제 막 마른 몸을 햇살에 맡기고 전신욕을 시작했다. 오전엔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꿰차고 오후가 되면 금테를 두른다. 기꺼이 비운 자리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채워진다. 그것도 시시각각.


몇 번이나 나서려다 주춤, 몇 주가 흘렀고 계절이 바뀌었다. 나를 가로막은 게 과연 날씨였으랴.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연락과 동행을 간절히 기다렸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연락이 닿자마자 성큼 문 밖을 나선 걸 보면.


사과 두 알과 귤 두 개를 챙겨 나선 길, 그녀의 가방에서 나온 따끈한 고구마 두 개. 천천히, 놀멍쉬멍 걸어도 될 숲길 양식. 알콩달콩 수다는 덤이다. 산수유 열매가 매서운 겨울바람에 물기를 거두니 더욱 붉다. 잘 마른 몇 알 끓여 마시고 싶다.


초록옷을 벗어던진 입구의 거인, 제법 탄탄한 몸이 섹시하다. 철과 나무껍질로 이룬 몸이 잘 마른 넝쿨들로 더욱 듬직한 실루엣이 되었다. 태양에 적당히 그을린 아랍의 조각 미남처럼. 그는 늙지도 않는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맞이한다. 무심한 듯 앞만 보는 시크함도 나를 설레게 하는 그의 매력포인트다. 나 또한 그를 붙잡지 아니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시원스레 곁을 떠난다. 언제나 거기 있음을 알기에 나의 걸음은 미련이 없다.


걷는 곳마다 온통 비움이다. 시선의 끝에 거리낌 없는 숲의 나신. 그 굵직한 동맥의 끝에 수많은 모세혈관이 하늘로 뻗어 들숨과 날숨을 이어간다. 저 앙상한 가지 끝, 껍질 안에는 유록의 생명이 자라고 있을 터. 숱한 무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써 망울을 키워내고 있다. 천 개의 바람 앞에서도 꿋꿋하게. 만져 보니 이미 망울이 통통하다. 지난 몇 날의 비와 눈을 먹고 살찐 모양새가 벌써 보들보들한 것이 여간 귀엽지 않다.


걷다 보면 유독 볕이 좋은 자리가 있다. 작은 못과 오솔길 옆, 흔적만 남은 집터에 앉아 그 볕을 즐긴다. 바람도 쉬어가는 자리, 아기 햇살에도 봄인 줄 알고 삐죽 자라난 초록 풀들. 겨울이어도 해님은 여전히 힘이 세다. 사람도 자연도 그 앞에 쪼그리고 있자면 놀라고 긴장된 몸과 마음이 단번에 스르르 풀어져 녹아내린다. 윤슬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저래야만 하는데. 미련 없이 보내고 맞이해야 하는데. 계산하고 욕심부리다 놓치고 잃어버린다. 사람나무들이 사는 숲은 속절없는 계절 싸움이다. 영역도 없이 무조건 덤벼야 산다. 쌍심지를 켜고 번득거린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적당한 거리와 당연한 배려는 자꾸 힘을 잃는다. 쥐고 있는 것이 많아서인지, 아예 가진 것이 없어서인지. 이미 겨울나무가 된 허허로운 내 마음은 누가 툭 치기라도 하면 바스러질 것 같다. 몇 날의 비와 눈이 바람을 뚫고 나를 관통하지 못한 탓이다. 나는 숲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이유다. 내 마음이 초췌하니 야윌 수밖에 없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서로에게서 떠났다. 닿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는 모두 외롭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니 당연하다는 듯이 가을은 겨울 뒤로 사라지는가. 또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가. 모든 것을 취한 자리를 기꺼이 버릴 줄 아는 저 계절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땟국물 가득한 몸을 기어이 끌고 오지만 나는 아직 그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숲이 말한다. 내일 한 번 더 오라고. 그리고 또 내일도. 그래서 이 모든 계절의 시간을 걸어보라고. 그럼 한참 남은 봄이 한창인 겨울 속에서 어떻게 살찌는지 알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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