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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연 Mar 25. 2017

멀고도 가까운 그녀

엄마라는 이름에 대하여

할머니의 부재는 얼마 동안 우리 집에 상심의 그림자로 자리 잡았으며 표현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슬픔을

온전히 혼자 감당하고 계신듯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만나 힘든 삶을 함께 견디고 버티어온 엄마는 때론 서로를  상처 주고 상처받기도 했던 애증의 관계이면서도 많은 의지를 했던 것 같다. 

할머니 못지않게 생활력 강하고 의지가 강했던 엄마..


지금부터는 나는 나의 엄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름다운 두 번째 그녀, 엄마는 자존심과 총명함과 당당함의 오뚜기 같은 그런  존재였다.


고향을 떠나 타지로 올라와 아버지는 정착하지 못해 방황을 하고 있을 때

엄마는 무조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셨다.

가족들을 굶기지 않겠다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나아가는 듯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가 가졌던 지금까지의 직업의  수만도 수십 가지가 넘을 것이다.


또한 자존심이 너무 강해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다치게 되면 가차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대방의 생각을 바꿔놓고 사과를 받아야 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삶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분이라 삶의 순간순간을  의지와 오기로 버티는 것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새벽에 고향에서 떠나 올 때 삼거리에서 눈물을 보였던 엄마는 아마 마음의 결심을 단단히 하고 꼭 성공해서

다시 고향에 내려오리라는 남 모를 결심을 하셨을 것이다.


엄마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할머니 못지않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스타일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의 사랑에 굶주려했다.


왜냐하면 엄마와 나사이에는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오빠는 큰아들 그 이상의 장남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과 우리 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오빠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과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오빠는 서울에 올라와서 스무 살 때부터 사업에 손을 댔다.

그 모든 사업 자금은 엄마가 재산을 모아놓는 족족 사업자금으로 나갔고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업이란 것이 잘되면 재투자를 해야 하고 안되면 빚을 얻어해야 하는 것이므로 사업으로 인한

윤택한 삶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필요로 할 때 엄마는 생활전선에 나가야 했고  또는 오빠의 사업 뒷바라지를 위해 오빠를 따라다니며 지원군 역할을 하느라  나는 늘 엄마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야 했다.


나는 이런 엄마와 오빠에게 못마땅한 마음에 몇 번 대들었다가 혼나기도 했지만 도저히 엄마의 처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엄마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나는 더 화가 나고 늘 마음이 부족한 상태로 나도 점점 엄마에게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게 되어갔다.


내가 엄마에게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마루에서 엄마 다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

천둥이 칠 때 또는 바람이 방문을 흔들어 공포스러울 때 날 안심하게 만들고 안아 주는 것?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할머니 대신  맛있는 된장국을 끓여주고 달콤한 찐빵을 만들어 주는 것?

소풍 가는 날 다른 엄마들처럼 나의 손을 잡고 도시락을 싸고 함께 가는 것?

모르겠다 내가 원한 것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엄마와 나는 가까우면서도 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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