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마당을 나온 꽃

by 보리

마당을 나온 꽃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흙길도 아니고

자갈길도 아니고

지옥길을 걸었다.

그늘도 있고

시원한 물도 있던 곳

지켜준다며

묶인 손발과

꽃피는 것조차

허락이 필요했던 시간들

너무 많은 손길에

내 향기가 지워졌다.

물까치 떼

하얀 선 그으며 날아간

하늘 가까이

이름 없이 피어도 좋으니

바람 지나는 곳에

꽃씨 하나 떨구고 싶어

가만가만 곱게 피는 것보다

이리저리 포개어 눕는 풀,

노을이 그려 준 그림과 이웃하며

고단했던 나를 배웅한다.


마당을 나온 꽃5.jpg





숲에서 만난 ‘걷는 꽃’


숲길을 걷다 보면

꽃과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산꼭대기에만 있던 산초나무가

어느새 산아래까지 내려와 어린 순을 세우고,

못 보던 환삼덩굴은 산입구를 온통 뒤덮었다.


한때 천남성이 무리 지어 자라던 자리엔

올해는 칡덩굴이 검푸른 그늘을 드리웠다.

칡덩굴에 쫓겨난 천남성은 산 여기저기로 옮겨가

목을 들고 섰다.


개망초와 애기똥풀이 아래로 아래로,

마을 입구까지 걸어와 핀 모습을 보며

‘꽃에게도 다리가 있구나’ 감탄한다.


작년에 꽃밭에 심어 둔 꽃이

잔디 위에서 새 싹을 밀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이 떠올랐다.


모성애와 정체성, 삶과 죽음, 소망과 자유, 생명과 자연의 먹이사슬, 입양 문제까지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아낸 이 동화는 어른들이 더 많이 읽었다.


폐계 판정을 받고 버려진 암탉 잎싹이의 고단한 삶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살았던 이 땅의 어머니들의 삶을 보는 것 같았다.


버려진 오리알을 품어 태어난 아기오리에게 '초록머리'라 이름 지어 정성껏 기르고, 겨울이 되어 초록머리가 청둥오리 무리와 함께 떠나는 것을 보며

그제야 잎싹은 자기도 하늘 높이 날고 싶었다는 인생의 꿈을 깨닫는다.

하지만 너무 늙어버린 자신을 자조하며 마지막으로 족제비에게 자신을 잡아먹고 새끼들을 살리라며 목숨을 내어준다.


잎싹이의 영혼은 마침내 자신이 원했던 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넓은 세상을 만난다.


마당을 나온 암탉

꽃밭을 나온 꽃

볼수록 똑같다.


삶에서 죽음으로 움직이는 삶

아직은 살아있다.


마당을 나온 꽃6.jpg



"어리다는 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아가, 너도 이제 한 가지를 배웠구나.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마당을 나온 암탉. 161~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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