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낮술

by 보리

낮술



하늘이 너무 맑아 눈이 시릴 때,

종이 위에 잔 하나 내려놓고

투명한 공기 속을 서성이는

말들의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잔을 채운다.



한 모금 들이키면,

세상의 단단한 껍질이

부드럽게 풀리고,



길을 잃어야만 보이는 풍경,

그 흔들림 속에서

하나씩 말을 길어 올린다.



조금은 흔들려야,

조금은 기울어져야,

꽃도, 바람도, 사람의 얼굴도

낯설게 빛난다는 것을.



곧고 맑은 정신으로만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세상은 눈부시게 제정신인데

내 눈앞은 비틀거리며 흔들려,



남은 건, 빈 잔 하나와

뜨거운 말 한 모금,



그 흔들림에 발을 맞추며

세상이 조금 기울어진 듯

바람 한 점에도

허공이 먼저 휘청거린다.



사물의 옷을 벗기고

다른 이름을 입히고 나면

고양이는 달빛의 손가락이 되고

풀잎은 바람의 수염이 된다.



그 순간,

처음 보는 풍경으로

낯익은 길이 낯설게 열리고,

세상이 늘 나를 비껴서 지나가듯

나 또한 세상에 비껴 서 있다.



오늘은,

길을 잃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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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일이

시를 짓는 일이

세상의 무늬를 나만의 시각으로 그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시는 취기다, 낮술이다.


눈앞의 세계를 흐릿하게 보되

그 흐릿함 속에서

숨은 진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려고 애쓰는 일이다.


모든 것이 이름을 바꿔 달고 나면

다시 세상은 기울어지고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


시는 그래서 언제나

낮술에 젖은 잔으로 시작된다.


세상을 견디기 힘든 날에도

머릿속은 서늘하게 흔들리고

가슴은 불콰히 달아올라

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싶다.


이것이 삶이 내게 권하는 잔,

맑으면서도 서늘한,

그러나 어딘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발효된 말의 취기.


시를 쓴다는 것은

인생이 끝없는 발효되는 과정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썼다.

‘글짓기 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장 하나쯤은 받아서 돌아왔고

대학시절, 문학회 동인활동을 하며

대학 문학상도 받아봤다.


평생 ‘목메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가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시인이 될 줄 알았다.


잘 풀리기만 한다면

그게 어디 인생인가?


직장인, 엄마, 딸, 며느리, 아내....

수많은 의무에 깔려

하루를 버티는 일조차 벅찼다.


그 세월이 사십 년

내 안에 익어가던 말들이

시름시름 녹아버렸다.


이제라도

가라앉아버린 말 하나씩

다시 건져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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