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익었다.
배가 익었다.
지난가을
먼 하늘 길 걸어간
윗집 아저씨네 마당에
배가 익었다.
봄날이 다 가도록
하얀 눈발 같은 배꽃이 흩날려도
한참을
불 꺼진 창가에 누워 울던 여자가
불현듯 일어나
배나무 아래 꽃을 심었다.
서리 맞은 바람에
흔들리는 배.
나 여기 있네.
이승을 건너가는 눈물 머금고
배가 익었다.
오랫동안 암투병을 하는지도 몰랐던 이웃,
마지막 몇 달 전까지도 성실하게 일하던 모습.
그리고 한참을 불 꺼진 집.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이별에 몸져누웠다는 소식.
겨울이 가고,
눈물 같은 하얀 배꽃이 피었다 흩날려 떨어지고,
봄이 한참 지나고서야
여자는 밖으로 나와
배나무 아래 꽃밭에 꽃을 심었다.
이별.
그 찬란한 슬픔을 먹고 배가 익었다.
70년대,
‘첫사랑 공모전’이라는 것이 있어 해마다 한 권씩 수기집이 출간되곤 했다.
한참 감수성 예민하던 사춘기.
해마다 수기를 읽으며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왜 사랑은 슬퍼야 아름다운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중에 최우수상을 받았던 이야기 하나.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무작정 탄광촌으로 들어가, 시댁식구들까지 부양하며 옷을 기워입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행복했던 여자.
광부인 남자는 매일 술을 마시고 ‘이하에 월백하고’를 읊으며 울었다 한다.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가는데 광산사고인지 결핵인지로 젊은 남편을 떠나보냈다.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은 인터뷰와 사진이 실리곤 했는데, 만삭의 배, 뒤로 질끈 묶은 머리를 한 온몸에 슬픔이 가득한 여인이 서있었다.
그 후 ‘이하에 월백하고’를 읊으면 달빛 아래 흩날리는 배꽃이 눈앞에 피었고,
그 하얀빛이 눈물처럼 스며들었다.
그렇게 이화(梨花)는 나에게
슬픔이었고,
눈물이었고,
죽음이었고,
그리고 오래된 첫사랑이었다.
多情歌(다정가 ) - 이조년(李兆年)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하얀 배꽃에 밝은 달빛 비치고, 은하수 흐르는 깊은 밤에
이 한 가지 봄 마음(연정)을 두견새야 어찌 알겠느냐마는
다정한 마음이 병이 되어 잠 못 들어하노라
고려 충혜왕 때의 문신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 쓴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사랑 시조, 혹은 정한(情恨)의 시조이다.
시조의 초창기 때 사대부가 이런 사랑의 시를 썼다는 것이 놀랍다. 그야말로 연애 시의 백미(白眉)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적 서정시의 원형’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완결성이 뛰어나고, 형식은 짧지만, 한 줄 한 줄이 자연의 정경(情景)과 인간의 정서(情緖)를 완벽히 합일시킨 명작이다.
안향(安珦)의 제자로 벼슬이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던 그는 충혜왕의 황음(荒淫)을 여러 차례 충간하다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한 강직한 선비였다.
이 시조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星州)에서 만년을 보낼 때, 임금의 일을 걱정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사랑이든 인생이든, 너무 아름답기에 슬픈 순간,
그 절정의 순간에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바로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가 가진 시대를 초월한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