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나무에게 길을 묻다.

by 보리

나무에게 길을 묻다.



부러져 누운 소나무가

눈부시다.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견디며

더는 버틸 수 없던 순간,

무엇을 기다렸을까.



무엇과 맞서다

굽고 흔들며 지켜온 세월을

무참히 버렸을까.



살다 보면

버려야 할 것은 추억이 아니라

붙잡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들이 찬란할 때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러져본 이 만이

곧게 서는 법을 안다



가장 빛나는 순간에

놓을 수 있는 용기가

더 깊다는 것을

무너져 누운 뿌리는 말이 없다



무성한 가지 아래에서

조용히 다음 생을 준비할 뿐

가지는 하늘을 잊은 지 오래다.



삶이 몰아칠 땐

무너진 가지 아래

무성한 침묵을 뚫고

다시 푸름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나도,

때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었다.


소나무 죽은2.jpg





지난겨울, 큰 눈이 내려 뒷산의 소나무 수십 그루가 쓰러졌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이

허리를 꺾인 채 길을 막고 누워 있었다.


쓰러져 길을 막는 소나무를 베어내며 가슴에 무거운 것이 얹힌 듯 아팠다.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를 소나무의 속살이

그토록 여린 것임을,

살아남은 참나무보다도 더 연한 결로 가득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철 푸른빛으로 굳센 줄만 알았던 소나무,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생이 거기 있었다.


누운 채 여전히 푸른 솔잎을 보며

저 푸름이 언제 바랠까,

그 바람이 끝나는 날은 언제일까.

기다렸다.


그리고 반년,

반년이 흐른 뒤에야

솔잎은 누렇게 빛이 바래고

비로소

나는 그 빛을 더 이상 생을 마친 슬픔이 아니라

찬란함으로 보게 되었다.


가장 찬란할 때부터

천천히,

스스로 서서히 비워가는 일,

그것이 삶이란 것을 깨달았다.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살아내며

단 한 번도 자기 자리를 바꾸고 싶다 말한 적 없는

소나무 곁에 이제 어린 나무들이 자라난다.


소리 없이,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생.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일.


우리가 알지 못한 세상의 대부분의 희망과 사랑은

그렇게 말없이 자란다.


소나무 죽은3.jpg


작가의 이전글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