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란강(海蘭江)을 지나며
해란강(海蘭江)을 지나며
- 신미년 해란강 참변을 기억하다.
큰 돌을 얹고
살을 채찍으로 벗기던 날의
비명소리로
강가의 바람은 아직 젖어 있고
어느 날은 독립군이
어느 날은 시인이
어느 날은 아이를 업은 어미가
이 강을 건넜다.
아이의 손을 잡은 어미
곡괭이를 놓은 농부
성경을 감싸 쥔 노인
모두가
찢겨나간 조국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총끝에 꺾인 이름들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그날 이후
해란강은
붉은 물소리로 흐른다.
등 떠밀려 만주로 넘어온
이름 없는 겨레들이
돌아갈 길은 물결에 지워지고
강을 끼고 잠든 집들
저 굽이진 강줄기
그리움과 슬픔에
강물도 휘돌아 흐른다.
나라 없는 그림자들이
물속에 잠긴 밤이면
강물은
깊은 침묵으로
강바닥 돌의 등만 닦아주었다.
강이 운다.
사람이 운다.
물결 따라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지금도
밤마다
울고 있다.
해란강(海蘭江)은 만주어 하이란 우라(Hailan Ula)에서 유래된 이름은 ‘ 푸른 강’, ‘아름다운 강’이란 뜻의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흐르는 200Km에 달하는 강이다.
백두산 서북 자락에서 발원하여 연길, 용정, 화룡을 흐르며 두만강으로 합쳐져 동해로 흐른다.
항일운동의 역사,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망명과 이주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적 강이다.
백두산에 가기 위해 버스는 연길과 용정을 오가며 해란강을 끼고 달렸다.
간도에 정착한 조선사람들이 팠다는 용두레 우물.
독립군들의 약속장소였다는 일송정 푸른 솔
연길에서 용정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해란강을 지나며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이 일제의 수탈을 피해 간도로 이주했다.
그 수는 무려 200만 명.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연길과 용정 땅에 터를 잡고 논을 일구고 교회를 세웠으며, 민족학교를 열고 항일 무장투쟁의 군자금을 댔다.
해란강 주변은 민족 교육기관과 독립군의 거점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931년) 10월경
신미 해란강참변이 일어난다.
일제는 이곳의 조선인들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을 빌미로 해란강 일대 조선인 마을을 급습해 이유 없이 체포하거나 총살, 집단 고문과 화형, 투옥 후 실종되는 등 수천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그 내용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생존자들은 ‘이를 뽑아도 투항하지 않은 독립군의 입안에 대고 총을 쏘아 죽이고,
"큰 돌로 몸을 눌러 가죽 채찍으로 살을 뜯었다."는 끔찍한 구술 증언이 있다.
수많은 시신이 해란강에 유기되어 핏물이 흘렀고 이후 강은 붉은 물소리로 흐른다고 말했다.
1920년 백두산 서북쪽 청산리 일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기습전으로
일본군 약 1,200여 명을 사망케 한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그 보복의 결과가 바로 신미 해란강참변(간도참변)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40세에 하얼빈에서 밀정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장군의 부인은 뒤를 밟던 밀정들에 의해 린산에서 잔혹하게 난도질당해 살해당했는데 그 옆에 ‘발가벗은 갓난애가 바둥바둥’ 거리고 있었는데 김좌진 장군의 유일한 딸 산조였다.
고아가 된 산조는 독립운동가 김기철에게 맡겨져 자랐으며
조선족 청년 위정규와 결혼,
1951년 6·25 전쟁 중 남편이 전사하자 딸 홍련을 데리고 병마와 가난 등 수많은 고난 속에 살다 2003년 9월 14일, 향년 75세로 유방암 등 지병으로 사망했다.
산조의 삶은 찢긴 조국처럼 험난했고 불우했다.
지금도 해란강을 따라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수십만의 조선족들이 살아간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가장 성실하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한국에 일하러 온 조선족들 역시 병원과 건설현장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든 노동을 감내하고 있다.
간혹, 한국에서 차별받는 조선족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들 또한 한민족의 핏줄이요, 조국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역사의 강은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